비와 대합실

by 이봄


천장이 높은 대합실이었지만 웅웅 소리가 울렸다. 걸음을 재촉하는 발걸음에 점점 높아지는 대화 소리가 한 데 어우러져 목청을 키웠다. 도심의 매미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짝을 부르기 위해 우는 매미는 자동차의 소음에 목소리가 묻힐 때마다 점점 목청을 키운다고 했다. 그래서 도심에 사는 매미와 시골에 사는 매미와는 목청의 크기가 다르다고 했다. 웅성웅성 말소리가 커지고 그러면 사람들은 거기에 맞춰 목소리를 높였다. 매미의 구애나 사람의 대화나 묻혀서는 안 될 일이었다.

신원불상의 사람들이 삐죽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멀어져 갔다. 새벽부터 내린 비는 몇 번의 자리바꿈으로 잦아드는가 싶더니 다시 요란을 떨며 내렸다. 그럴 때마다 대합실로 밀려 들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우산을 받쳐 들었다고는 해도 한쪽 어깨쯤은 비에 내줬다 생각하는 게 편할 만큼 쉽게 비에 젖었다. 바람이 불었다. 찡그린 얼굴들이 도처에서 튀어나왔다. 툴툴 아이처럼 투레질을 해댔다. 한바탕 욕지거리를 하지 않는 게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 날씨였다.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은 아직도 한 시간여를 남겨두고 있었고, 역의 대합실을 벗어나면 정신없이 비가 내렸다. 역에 딸린 작은 공원엔 그늘막이 좋은 벤치가 몇몇 있었고, 제법 그럴싸하게 지은 정자도 있었지만 비를 긋기엔 역부족이었다. 화창한 날씨였다면 공원을 어슬렁거리다 담배도 한 개비 피워 물면 그깟 두어 시간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니었겠지만, 딱히 비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은 날에는 얘기가 달랐다. 꼼짝없이 역사에 갇혀 오가는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웅웅 울리는 매미소리에 귀가 둔감해질 때쯤이면 팔딱팔딱 날뛰던 시간은 유명을 달리할 터였다.

첫날의 시간은 이렇게 생겼다. 하릴없는 날에 그보다 더 한가로운 시간이 비에 젖었다. 신원불상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게 오늘 남자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역사를 끼고 조성된 소공원이 한동안 남자가 일을 해야 하는 직장인 셈이었다. 끽연을 즐기는 사람들이 몰래 버린 담배꽁초며 휴지등을 줍는 일이 남자에게 배정된 자활근로였고, 그 장소가 역사에 딸린 공원이었다. 오락가락 비가 내리는 관계로 적당히 알아서 시간을 때우라고 했다. 퇴근시간에 얼굴을 들이밀어야 했으므로 집으로 땡땡이를 칠 수는 없다. 아, 집이 근처라면 그것도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아쉽게도 남자의 집은 제법 멀었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은 역사를 지키는 망부석이 되어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비와 구름의 몇 번의 자리바꿈이 있었다. 주룩주룩 시작한 새벽 노래가 후둑후둑 잦아들다가 이내 다시 와하고 몰려들었다. 전철역 대합실에서 귀 쫑긋 세우고 지켜본 오늘이다. 덩달아 남자도 비와 구름 사이를 종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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