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갛게 갠 하늘과 정갈하게 씻긴 대지 사이로 파랗게 바람이 불어 갑니다. 그 틈바구니를 오가는 사람들은 환하게 웃었습니다. 날씨가 주는 힘이 대단하다 느끼게 됩니다. 어제와 오늘, 그 짧은 시간 동안에 모두 로또라도 당첨이 된 것만 같습니다. 스쳐가는 얼굴을 바삐 들여다보노라면 모두들 미소 한 모금씩을 물었습니다. 오물오물 볼태기가 볼록하게 도토리를 물고 있는 다람쥐들이 오갔습니다.
장맛비가 독차지했던 자리마다 바람이 불었습니다. 바람은 가벼웠고 싱거웠습니다. 무엇 하나 매달지 않은 바람은 조용조용 까치발로 불었습니다. 시끄럽지도 않았고 요란스럽지도 않았습니다. 잔뜩 초록을 더하는 나뭇잎을 흔들었고, 계단을 오르는 여인네의 치맛자락을 흔들었습니다. 그래도 심심했던지 머리카락을 헝클어놓더군요. 개의치 않았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생각도 없이 온몸을 내맡기고 있었습니다. 시원하더군요. 한낮의 기온은 뜨겁고 후덥지근할 거라는 일기예보가 무색했습니다. 하긴, 아직은 정수리에 햇살이 내리쬘 시간은 아닙니다.
사서 고생할 이유가 없듯 미리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골머리를 싸매고 고민을 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도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나름의 시간을 찾으면 그뿐입니다. 벤치에 앉은 내가 바람을 맞고 있다는 것 하나와 자꾸만 그늘이 옮겨간다는 것 하나가 중요합니다. 엉덩이를 무던하게 붙이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옮겨가는 그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있어야만 합니다. 한 뼘씩 그늘이 옮겨가면 나도 시치미를 떼고 앉아 한 뼘씩 엉덩이를 들썩이게 되네요. 아, 재밌습니다.
젊은 녀석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시간을 보내실 거예요?"
살갑더군요. 이틀째 보는 얼굴이라고 낯설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물론 나도 그랬습니다. 동료라고 하기에도 좀 웃긴 사이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한 사이도 아닌, 웃긴 관계입니다. 같이 공원에서 시간을 죽여야만 하는 동료가 맞는데 녀석은 그럴 생각이 없어보입니다. 포르르 참새 마냥 공원을 한 바퀴 돌더니만 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말릴 이유가 없으니 그러라고 했습니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내시려고요?"
핸드폰을 열어 사진 몇 장을 보여줬습니다. 심심하면 공원도 잠깐 돌고 이렇게 사진 한 장 만들면 금방이라고 얘기했지요. 영화 포스터를 보는 것도 같고, 책의 표지를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웃었습니다.
풍경을 스케치하고 생각을 끄적이면 금방이겠다 생각했습니다. 엉덩이 비비고 앉은자리만 다를 뿐입니다. 방바닥에 앉았느냐, 벤치에 앉았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어디면 어떻습니까. 생각이 자리를 가리고 바람을 탓할 일은 없습니다. 챙 넓은 벙거지모자라도 하나 장만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산천을 떠돌며 앉은자리에서 시 한 수 읊고 가는 방랑시인이다 해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습니다. 사람 속에서 사람을 이야기하고 자연 속에서 바람을 노래하면, 또 모르지요. 훗날 향기 좋은 바람으로 세상을 떠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런 젠장! 또 그늘이 옮겨갔습니다. 정수리에 햇살이 반짝이고 볕에 뻗쳐둔 다리가 뜨겁네요. 뭐 다 좋기만 할까요. 이런 불편함도 있어야죠. 허허, 그거 참.... 말꼬리도 한 번쯤은 얼버무려야 뒤집어쓴 벙거지모자가 어울릴 판입니다. 나는 웃고 바람도 까르르 달아나는 오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