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비 한 마리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이어질 듯 길게 늘어선 계단을 따라 나풀나풀 나비의 날갯짓으로 그대 오시었죠. 어찌나 곱고 강렬했는지 모릅니다. 꽃밭을 노니는 나비가 따로 없었습니다. 꽤나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계단이 늘어선 곳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그때의 그대가 떠올라 걸음을 멈추게 됩니다. 조건반사일까요.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계단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어여쁜 당신을 떠올리고야 맙니다. 입꼬리 잔뜩 추켜올리고 싱긋 웃게도 됩니다. 순전히 나비 때문입니다. 바람을 닮은 치맛자락은 꽃향기 잔뜩 머금고 하늘거렸습니다. 하늘하늘 바람을 일으키는 나비가 있었지요. 넋을 놓고 바라보던 나는 그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굳이 지구 반대편을 찾아가 태풍이 부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습니다. 분명 나비 한 마리 날아들었을 뿐인데 한 사람의 우주가 바뀌었으니까요. 그깟 태풍이 대수겠습니까. 한 남자의 세상이 송두리째 바뀌고, 새롭게 바라보는 것들은 어제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아, 이럴 수도 있구나!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는 없더군요. 그것은 마치 오래된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처럼 단단하고, 온전하게 가슴에 새겨졌습니다. 세월이 무색할 화석입니다. 비바람 앞에서도 천 년 세월을 견딜 그대입니다.
"아직도 그때 그 얘기니?"
그대는 그 얘기를 꺼낼 때마디 눈을 흘기며 핀잔의 말을 늘어놓기도 합니다만, 고작 십 년을 코 앞에 둔 어제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지만 너무도 생생하고 고운 기억이라 그렇습니다. 기억처럼 불완전한 것이 없다고는 하지만 평생을 두고 생생한 기억도 있게 마련입니다. 하늘하늘 바람이 불고 나풀나풀 나비로 오시던 그때가 평생을 관통하는 기억일 듯합니다.
오늘도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 하루입니다. 꾸역꾸역 사람들은 몰려들고 열차는 또 그 많은 사람들을 싣고 떠납니다. 어디선가 열차를 바꿔 타고 대나무살 갈라지듯 얇게 얇게 쪼개져 각자의 목적지로 날아가겠죠. 그 끝에는 반가운 얼굴이 기다릴 테고, 어쩌면 눈물 한 바가지 쏟아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길에는 그래서 미처 거두지 못한 말들이 아우성치기도 합니다.
노란 양산을 받쳐 든 여인이 지나치는데 딱정벌레 한 마리가 양산 속으로 날아들었습니다. 소스라치게 놀란 여인이 딱정벌레를 내쫓으려 손을 휘휘 저었지만 딱정벌레는 그럴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손을 저으면 저을수록 양산을 파고듭니다. 빙그르르 여자가 몸을 돌리고 팔짝팔짝 발을 굴렀습니다. 얼쑤! 어깨춤이 제법 신명 납니다. 노란 양산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코앞에서 펼쳐지는 왈츠를 놓칠 수가 있나요. 턱을 괴고 앉아 웃었습니다. 젊은 여인이 어찌나 당황하고 호들갑을 떨던지 안쓰럽기도 했지만 딱히 도와줄 방법은 없었지요. 아니, 워낙 남녀가 유별한 세상으로 회귀한 요즘이라서 말 한마디 몸짓 하나가 조심스럽습니다. 빙글빙글 뱅글뱅글 몇 바퀴를 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밌는 공연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공짜 공연을 특석에 앉아 관람하는 재미가 쏠쏠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박수라도 야박하지 않게 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네요. 아, 미안스러워라! 얼얼한 손바닥을 몰래 뒤춤에 감췄습니다.
누군가는 당산역 계단에서 보았던 나비 한 마리를 의정부역 계단에서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테지요. 덜컹덜컹 기차가 지나가고 우르르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면, 망초꽃 흐드러진 풀밭에 하얀 바람으로 날고 있는 나비를 만나겠지요. 너울너울 가슴에 새겨지는 암각화가 황홀할 게 분명합니다. 물끄러미 역사의 계단 앞에 서서 웃고 있는 사람들이 꽃처럼 필 터입니다. 기억이란 때로 꽃보다 향기롭기도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