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쓰는 '사람의 세상을 결정짓는다'라고 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른 사람에게 옮길 때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는 그래서 중요하다. 평소 그 사람의 언어습관이 만드는 말의 세상인 까닭이다. 말이란 집단의 철학이 합의한 형태로 만들어지고, 그를 바탕으로 생각의 의미를 왜곡됨 없이 상대에게 전하는 철학적 행위다. 그래서 어떤 말을 쓰느냐 만으로도 어림짐작 상대를 파악할 수도 있다.
일반화의 오류가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평소 거친 언어습관을 보여주는 사람은 행동에서도 거친 모습을 보여줄 가능성이 높다. 말은 의식을 지배하고 의식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말이 고운 사람은 그래서 몸짓도 곱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다. 말의 힘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은 이미 속담 하나가 증명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반대로 오는 말이 사나울 때 필경은 다툼이 일어나고 거친 몸싸움을 부른다. 굳이 뉴스에 시선을 고정하지 않아도 쉽사리 목도하는 일이다. 주차문제로 언성 높이다가 칼부림으로 비극을 불렀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는 것도 다 그런 연유다. 세 치 혀는 때로 창 칼보다도 날카롭고 예리하다. 애써 큰 칼을 휘두르는 것보다 몇 곱절은 쉽고 빠르다.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들을 전광석화로 쏟아내고서 딴청을 부린다.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을 바꾸는 사람은 천박하고 상스럽기 이를 데 없다. 중증의 치매나 건망증이 아니라면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은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분명 상처를 입고 만다. 온몸에 바늘을 꽂고 거리를 활보하는 고슴도치와 다를 게 없어 그렇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도 그렇다. 하루에 말 하나씩 지워가는 과정이 늙는 거다. 지워지는 말이 갖고 있던 세상도 말과 함께 지워지고야 만다. 늙는다는 것은 그래서 육체적 행동반경의 축소만이 문제가 아니다. 머릿속에 남는 공격적이고 날카로운 말들 혹은, 유아적 유치함에 매몰된 세상에 에워싸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자신이 구축한 편협한 세상을 철옹성으로 지키는 게 늙음의 또 다른 모습이다.
책이나 문학작품에서 만나는 지혜롭고 품 넓은 어른을 만난다는 건 사막에서 만나는 오아시스와 다르지 않다. 몇 날 며칠을 떠돌아도 야자수 우거진 오아시스는 신기루처럼 아롱지다가 이내 사라진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자애롭고 지혜로운 노년을 꿈꾼다고 해서 그렇게 될 확률은 그다지 높지가 않다. 말을 잃는다는 것은 그래서 무섭고 두려운 일이다. 하나씩 지워진 말들이 마침내 산더미처럼 쌓였을 때 남는 것은 고집과 불통이다. 툭하면 과거의 유산을 입에 올리고 그 유명한 커피를 주문한다.
"라떼는 말이야~~"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강요하고 부리는 말은 쉽다. 굳이 입술을 달싹이지 않아도 된다. 잔뜩 거만함을 매달고서 예의 그 턱주가리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말은 칼을 매달고 상대에게 달려든다. 나는 어떨까 상상이 쉽지 않다. 말을 지우기는 마찬가지여서 그렇다. 오래된 글을 찾아 다시 올려주는 글을 마주하면 낯섦이 느껴진다. 이런 낱말도 있었구나 하게 된다. 이렇게 표현을 했었구나 하게도 된다. 사용하는 말이 변하고 바라봄이 변했음을 직시하게 된다. 세월의 간극을 어쩔 수 없이 마주하는 건 당황스럽다.
되지도 않는 말을 날마다 주절거리는 이유 중 하나다. 말들을 기억하고 싶어서다. 기억의 방에 저장된 것들이 늘 팔딱였으면 해서다. 나무상자에 포개 누워 삼복더위에도 얼음이불을 끌어 덮고 있는 고등어처럼 커다란 눈망울을 꿈벅이고 싶어서다. 알록달록 말들이 만발한 노년을 꿈꾸는 것은 내 세상이 한 뼘이라도 넓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늘은 어떤 말 하나가 지워졌을까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