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를 막 시작하려는데 벤치에 앉았던 사내가 아는 척을 합니다. 목소리 보다 먼저 손을 흔들더니만 뒤따라 반갑다는 목소리가 이어집니다.
"일찍 나오셨네요?"
"아, 네. 아침부터 뭐 하세요?"
엊그제 비 내리던 날 정자에서 만난 사내입니다.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주섬주섬 가방을 뒤지던 사내가 막걸리병을 꺼내 들었습니다. 세상 해맑은 얼굴로 종이컵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 하시고 하세요? 방금 사 온 거라 시원합니다. 하하하"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내민 손을 민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넙죽 받아 들고서 아침을 열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아니요, 저는 더워지기 전에 공원을 한 바퀴 돌아야 해서요"
최대한 조심스럽게 뿌리쳤습니다. 그렇다고 한 번의 거절에 쉽사리 물러날 사내가 아닙니다.
"아이 참, 그러지 마시고 한 잔 쭉 하세요?"
"아, 아닙니다. 아침이라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시원하게 한 잔 하세요!"
몇 번의 사양 끝에 '한 잔 드시면 좋은데...' 하며 흐려지는 그의 말을 겨우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눈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지만 반갑게 인사하던 사내의 얼굴은 떨쳐낼 수가 없더군요. 말이 그리웠을 테고 사람이 고팠을 사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저 스치듯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고, 오늘은 날이 정말 덥네요? 말을 건넸을 뿐인데 반색을 합니다. 타지에서 만난 고향 까마귀정도는 됐을까요. 못내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던 사내가 나무 그림자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시원한 날입니다. 햇살은 따가웠지만 바람은 선들선들 곱게 불어 가고, 공원의 커다란 버드나무는 어찌나 마음씨가 고운지 모릅니다. 초록이 뚝뚝 묻어나는 그림자를 품 크게 드리우고 있지요. 그 그늘에 기대 사내고 잠자고 있었습니다. 공원을 한 바퀴 돌고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고 있는데 사내가 천천히 일어나더군요. 아, 택시승강장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사내입니다. 매일 승강장 바닥을 기웃거리며 담배꽁초를 줍는 사내는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남들이 피우다 버린 꽁초를 모았다가 한쪽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지요. 안쓰러웠습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담배 서너 개비를 주었습니다. 그러다 하루는 담뱃갑을 통째로 주었더니 싫다 하더군요.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하더니 그냥 서너 개비만 달라고 합니다.
"어? 오늘은 여기 있었네요?"
이 사내도 아까 그 사내처럼 환하게 웃었습니다. 절뚝거리며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하얗게 담배연기가 피어오르는 내내 사내가 말을 합니다. 일을 하다가 허리를 크게 다쳤었다고 합니다. 성모병원에 몇 달을 입원했었던 내력을 이야기하는 동안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버렸습니다. 벤치에 앉은 남자 둘이 궁금했는지 비둘기들이 하나 둘 발치에 모여들더니 구구구구 시끄럽게 울었습니다. 사내도 지나온 인생 궤적을 다 풀어놓으려는 모양입니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눈만 반짝였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 하더니 그 말이 맞는구나 하게 됩니다. 종일 역사를 서성거린다고 해도 누구 하나 살갑게 대할 사람은 없습니다. 또 모르죠. 그가 관심 밖으로 뛰쳐나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관심에 목마른 사내입니다. 주절주절 말이 이어지고 눈은 더욱 반짝입니다. 어쩌면 좋을까요. 말이 고팠던 사내들이 구구구구 말을 합니다. 눈인사 몇 번으로 모여든 사내들이 둘셋을 넘었습니다. 각자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게 고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