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촘촘히 싸맨 가슴에 구멍 하나 휑 하게 뚫고서 서리 같은 바람이 불었다. 누구나 그러할 터다. 누구는 먹고사는 것에 목을 매고 바람을 일으킬 터였고, 누구는 또 다이어트라는 말을 앞세워 물결을 일으킬 수도 있다. 경중의 차이가 있을 테고 관심사의 다양함이 나뉘겠지만 미동 없는 가슴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터다.
꽃이 피고 꽃잎 떨어지는 것에도 미풍이 불었다. 소낙비 내리고 천둥이 울 때 풍랑이 일었다. 스멀스멀 어둠이 방을 점령하는 순간에도 찌르르 등줄기에 소름이 돋기도 했다. 바람 잦아들다가 우지끈 허리 부러지는 태풍이 휘몰아치기도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해가 뜨고 구름이 몰려들었다. 그러고 보면 참 한심한 놈이구나 하게 된다. 단단하지 못한 내가 어정쩡한 몸짓으로 휘청거린다. 날마다 바람이 분다고 탓할 것도 없다. 너는 어째 하는 짓이 그 모양이냐? 스스로를 탓할 밖에 도리가 없다.
쟁여둔 것 없으니 놀고먹을 팔자는 아니다. 일을 놓을 수 없으니 출근을 해야만 한다. 예정된 시간이 다 됐다. 더는 미룰 수도 없다. 두 달의 시간은 더디고도 빨랐다. 하루하루는 더디고 힘겨웠지만 어느 순간 뒤돌아보았을 때는 화들짝 놀라게 된다. 남은 시간 하나 없이 벌써 오늘이 됐다. 절뚝절뚝 걷는 걸음엔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리게 된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목발을 내려놓았을 때 무릎이 시큰댄다. 두 달의 시간은 가뜩이나 성치 못한 무릎을 와르르 무너트렸다. 걸어야만 하고 출근을 해야만 하니 목발을 내려놓아야 한다. 없는 힘을 만들고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걸음을 내디뎌야만 한다. 아, 싱숭생숭 처량한 바람이 불었다.
마지막 봄꽃이 지고 초여름의 햇살이 열기를 더해가던 날, 우리 언제 다시 볼까? 인사를 나눌 때 이렇듯 긴 시간이 가로막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동안 장마가 비를 뿌렸고 염천의 햇살이 비지땀을 쏟게 했다. 사는 것에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일상이 있었다. 한 달이 지나면 널 볼 수 있겠지? 시간을 다독이며 땀방울을 훔쳐내었다. 그게 전부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는 바다처럼 넓은 강물로 흘렀다. 나룻배도 없는 강둑에 앉아 나는 흘러가는 강물만 바라보았다.
여름이 지났다. 매미가 울었고 귀뚜라미가 새벽을 깨웠다. 초록이 짙어 어둡던 그림자가 노랗게 물들었다. 계절이 바뀌었고 또 한 계절이 깊었다. 얼마나 많은 바람이 불었는지, 얼마나 많은 물결이 일어 여기까지 떠밀렸는지 조차 알 수가 없다. 빈 들에 먼지바람이 불듯 가슴엔 서릿발 서걱대는 찬바람이 불었다. 우물우물 뱉지 못하는 말 하나 목구멍으로 다시 삼켰다. 입 밖으로 내뱉어 좋을 것인지 장담할 수 없으니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뚫린 문풍지에 뱉지 못한 말들을 덧대는 날이다. 가슴 쓸어내리는 시간에도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