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생각했지. 이름따위가 그렇게 중요한가?
굳이 쌓인 눈을 뚫고서
힘겨운 이파리 몇 개 고개를 쳐들어야만
하는 간절함은 뭘까?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 하고,
금송아지 한 마리쯤 키우지 못한 집
없다는 게 우리의 삶이어서 그럴까?
곧 죽어도 나, 여기에 있어!
아니, 적어도 여기에 있었어!, 하고
발악에 겨운 항변, 온몸으로 부르짖는 몸짓.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어.
한 뼘에 가까운 눈이 쌓였고 기온은 곤두박질쳐서
연일 기록을 경신하고 있었는데도
녀석은 웅크리고 쪼그려 앉아서는
꼼지락 꼼지락 몸을 움직이고,
호호 입김이라도 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세월에 무릎 꿇고 계절에 고개 떨구는
일 따위는 죽어도 싫었던 게지.
아직은 초록이 분분한 몸뚱이가 좋았을 거야.
"거 봐! 겨울이 난리를 치고 법석을 떤다 해도 난 이렇게 푸르고 청초하게 건재해!"
언제까지 그 말을 입에 담을 수 있는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결코 지금은 아니야.
암, 그렇고 말고.
주문을 외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녹였을 거야.
마당을 서성이다 녀석과 마주쳤어.
"히야! 녀석 대단한 걸..."
눈을 맞추다가 찰칵 사진을 찍었어.
보름쯤 지나면 얼어붙어 삶을 마감할 지
아니면 저렇게 당당하게 엄동설한을 뚫어
봄날의 햇살을 맞이하게 될런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오늘 그의 모습은
동토에 꽃을 피워내는 선각자와도 같았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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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미안한 생각이 번뜩 스치는 거야.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 정말 미안했어.
이름도 모르는 거야. 내가.
뭔가 찌르르 기분 좋은 감전을 선물한 녀석인데,
분명 녀석에게도 이름 하나쯤은 있을 터인데.
이왕이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야! 너 참 대단하구나."
칭찬이라도 해 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잖아. 누가 나를 가리키면서
'어이 거기! 그래, 맞아 당신!'
이렇게 부른다면 당연 뚜껑 열리고, 심장은
부그부글 활화산으로 터지지 않겠어.
그래서 미안했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을 심고 잡초를 뽑으며
온갖 구박과 저주의 말을 퍼부었을 거야.
이놈의 잡초는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네.
우라질, 자라기는 또 얼마나 잘 자라나 몰라.
뽑고 뜯고 잘라내며
덤으로 잘근잘근 육두문자 섞어가며
녀석을 씹었을 텐데
오늘, 이렇게 감동을 던졌어.
"받거나 말거나 알아서 하슈!
옛수~~~! 감동 한 바가지..."
.
.
.
.
잔설이 잦아들고
고양이 볕 좋은 담장에 앉아
까박까박 졸기 시작하면 이구동성
한 목소리로 합창을 해
드디어 봄이구나, 봄이야.
그러면 갑자기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 뛰듯
골목은 부산스러워 지고, 아이들은 재잘거려.
해걸음 저녁이면 식탁마다 부억마다
물 만난 물고기 파닥이듯
온갖 봄향기로 중무장한 나물들이 입맛을
자랑하기도 하고 그러지.
달래며 냉이, 꽃다지에 곰보배추 등등
"아, 죽이네. 역시 봄에는 냉이야, 냉이!"
국그릇은 달그락이는 숟가락 소리에 뚝딱 비워지고
소파에 길게 누운 개똥이 아버지는
부른 배 투닥이면서 봄을 칭송하겠지.
그런, 이름 있고 뼈대 있는 봄나물 가문의 후예
황새냉이도 쌓인 눈을 힘겹게 뚫고서
인사를 건내는 거야.
잎은 누렇게 뜨고 줄기는 꺾여서 이마가
눈밭에 닿으려는 몰골이었어.
처량한 꼬라지.....
그래도 늙은 황새냉이 튼실한 뿌리 곱게
씻어다가 매콤새콤 초고추장에 한 입 찍어내면
쌉싸름에 아삭아삭 게다가 사포닌은 또
얼마나 들었는가 침이 마르던 그 황새냉이가
비 맞은 생쥐꼴로 인사를 했어.
'세옹의 말'이 사람 사는 모습이려는가?
되묻게 되는 날이야.
이름도 모르는 잡초의 푸르름과 황새냉이의 퇴색.
.
.
하기사, 나도 그래.
냉이의 오늘이나 오늘의 내가 별반 다를 게 없어.
그럴지라도 뭐 그런 거지.
계절을 관통할 무엇은 없다 하더라도
오늘은, 지금은 아니야 하는 마음 한 조각.
버틸 수 있을 때까지는 뚜벅뚜벅 가야하는
길에 나는 서 있는 거라서, 그래서 길을 걷는 자의
(여행자의 의무와도 같은)
권리인 그 길의 끝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야.
바닷가 야트막한 언덕에 십여 채 이마를 맞대고
토닥투닥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
어쩌면 열댓 평 하늘을 머리에 이고
살아가는 산촌의 아담함이 기다리는지 궁금하잖아.
그래서 걷기로 한 거야.
이 길의 끝에 닿을 때까지.
이름도 모르는 녀석이 아름다운 이유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