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나

by 이봄


느닷없이 바람이 불고 구름이 몰려오듯 순간순간 마음엔 온갖 것들이 떠올랐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아우성이었고 침묵이었다. 누구를 가릴 것도 없고 특정한 누구를 떠올릴 이유도 없다. 누구나 그랬으므로 피해 갈 방법도 없다. 오죽하면 자는 동안에도 마음은 꼼지락거렸다. 꿈을 꿨고 몸을 뒤척였다.

계절의 초입에는 날궂이로 비가 내렸다. 꽃이 피고 졌다. 초록이 짙어지면 매미가 야단스러웠다. 어느 날에는 소슬하게 바람 불더니만 나풀나풀 눈 내리고 쌓였다. 길을 가로막아 오가는 것들을 멈춰 세울 수도 없다. 그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유치한 발버둥에 지나지 않았다.

너와 나 두 글자를 썼다. 최대한 가까이 붙여 썼다. 송곳 하나 겨우 꽂을 만큼의 공간을 띄워놓았을 뿐이다. 단지 두 글자를 쓰는 동안에도 꽃은 피었고 불어 가는 바람에 꽃잎 떨어졌다. 까만 하늘에 온 우주가 펼쳐졌다가 우수수 떨어졌다. 마음이 하는 일이다. 태풍을 만들었다가도 이내 적막에 휩싸였다. 물리적 공간을 나누고 붙인다는 건 그래서 소용이 없었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 너와 나를 굳이 구분 짓지 않는 '우리'라는 말 하나로 뭉뚱그려도 다를 것 없었다. 자음과 모음 사이에도 틈은 있었고 그 틈으로도 황소바람은 불었다. 세월이 들불처럼 밀려왔다 연기처럼 사라졌다.

말이 움트고 웃음은 햇살로 반짝였다. 스쳐가거나 쌓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나노의 세상이라도 결국 틈은 벌어지고 공간은 비어 휑하다.

자리에서 빠져나와 붓을 들었을 때 온갖 말들이 고개를 쳐들었다. 하고 싶은 말들과 하고 싶은 것들이 서로 밀치며 아우성쳤다. 들었던 붓을 내려놓았다. 앞에 놓을 말과 뒤로 미룰 말을 골라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온갖 것들 다 쓸 수는 없어서 이미 썼던 말들도 주섬주섬 주워 담았다. 결국 남은 말은 너 그리고 나 두 글자가 전부였다. 그거면 충분했다. 너 있고 나 있으면 세상 전부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앉았다. 가까이 쓰거나 아주 멀찍이 띄어 쓰거나 문제 될 것도 없었다. 너 있고 나 있는 것으로 이미 꽃은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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