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wpw Oct 16. 2019

화를 마주하는 시간

약점을 받아들이는 일

분명 두 달 전부터, 나는 끊임없이 보고를 올렸다. 변경사항이나 판단에 변화가 있을 때는 빠르게 알려줘야 한다고. 프로젝트 마무리에 가까워질수록 변경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로젝트 마무리를 한 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변경안을 잔뜩 들고 오는 이사의 우격다짐을 들으며, 나는 지금 이걸 때려치워도 책임감 없는 행동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된다, 안된다를 다투는 회의가 길어질수록 진이 빠졌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일정은 무척 급박했고, 담당했던 관리직이란 사람들은 권한은 휘두르고 책임은 회피하려 했다. 결국 그 담당자들이 인수인계조차 제대로 남기지 않고 도망갔다는 것은 사필귀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도 일은 일이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술직이고,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결과물을 내는 데 필요한 무언가가 모자란다면, 채워 넣어서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개발자로서의 프로그래밍 역량만큼이나 다른 재주들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도망친 사람들의 일을 같이 처리하는 것은 약간의 수고를 더 하면 되는 일일 뿐이었다. 그랬기에 더욱, 결정권자의 말을 귀담아듣고자 했고 그에 답해주길 바랐다. 돌아오는 것은 기대를 저버린 몰상식한 요구들이었지만..


회의실에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요구사항을 정리하면서, 나는 기술자니까,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긴 해. 하며 스스로를 다독이려고 애썼다. 마지막에는 내 능력 정도면 여기보다 더 나은 자리로 옮기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라며 썽난 마음을 털었다. 그래도 짜증이 잘 가시지 않았다. 감정은 감정이고,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정말 예상치 못했니? 그럴 리 없었다. 이 업계에서는 오히려 없는 게 이상할 정도의 일이었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고 일을 하려고 해도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삭혀지지 않는 분을 마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평소에는 마시지 않는 모카골드 믹스를 종이컵에 진하게 타서 건물 1층으로 내려왔다. 응당 담배를 손에 쥐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흡연자가 아니었다. 후루룩, 작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조금씩 나눠 마시면서 생각했다. 정말로 할 일이 많아져서 이렇게 화가 났어?


한 때, 배우는 것에 대해 오만했던 적이 있다. 지금도 사실 완전히 겸손하냐고 묻는다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리라. 보통보다는 성실하지만 깊숙이 스스로를 담금질하지는 않았다. 그런 건 촌스럽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안 그래도 대충 남들 하는 만큼보다 약간씩 잘했다. 아주 잘하는 애들은 그만큼 열심히 했고, 나는 그 애들보다 못할 때면 자연스레 저만큼 애쓰지는 않았다는 이유를 달아 마음을 속였다.


답은 뻔했다. 나는 일이 늘어나서 화가 난 게 아니라, 해야 할 일에 대해 자신감이 부족했다. 잔뜩 쏟아놓은 요구사항들 사이에서 이건 어떻게 만들지? 하는 두려움이 생기는 항목이 몇 가지 있었으니까. 물론 차분히 하나하나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순간에 못 만들면 어떡하지, 만들었는데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지, 만들어도 시간에 못 맞추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조금은 부당할 지라도 프로라면 요구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어렵다, 못한다 라는 말 대신에 화를 선택한 셈이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약점을 인정하는 것 역시. 이런 배움이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몸에 그런 자세를 익히지 못한 셈이다. 프로그래밍 능력은 기르면 그만이다. 평일과 주말을 할애하여 공부하는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 순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적절한 판단으로 협의를 하면 될 일이다. 나는 능력 있어 보이고 싶었고, 그것은 내가 이 업계에서 겪은 시간에 비하면 너무 큰 욕심이었다. 결정권자들은 기술자가 아니고, 나의 역량을 바르게 파악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는 것만큼, 하기 어려운 일에 감정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해야 결국 일을 바른 방향으로 해 나갈 수 있다. 지금 못하는 상황이 나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이 자신의 약점을 감싸고 돌기 위해 화를 내는 것이다.


오늘 받은 요구가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분명한 계획에 맞춰 과업을 충실히 수행했고, 사이사이의 변화들에 대해서도 성실히 응대했다. 그래서 오늘의 요구는 부당한 사고와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고 이것은 이것이다. 부당한 요구에 대해 새로운 협상과 부당함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나 스스로 나아져야 하는 일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이런 정직함을 유지하는 일은 늘 어렵고, 자주 잊게 된다. 그러나 같은 배움을 성실히 반복하는 것이 익히는 일이고, 무엇인가를 어엿이 익힌다는 것은 곧 그것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변화하고 싶다. 기왕이면 더 좋은 방향으로. 앞으로도 수 없이 벌어질 실수와 옹졸함에 대해서도 조금 더 현명히 대처할 수 있길 바라며.


 

작가의 이전글 죽음을 대하는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