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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Oct 07. 2019

레쓰비 한 캔

체온보다 조금 더 따스한

학교의 자판기에는 여러 음료가 있다. 그중에 제일 싼 것은 데자와와 레쓰비였다. 돈 한 푼이 아쉬워서 학식당에 가 공깃밥만 사서 공짜로 주는 김치랑 먹는 것도 하기 힘들 때, 나는 늘 레쓰비를 뽑아 마시고는 했다. 밥은 천 원, 레쓰비는 오백 원, 데자와는 육백 원. 대낮의 공복을 레쓰비 한 캔으로 버티고, 대충 저녁이 되면 밥 사줄 사람을 찾아 어슬렁 거리거나 집에 들어가곤 했다. 그때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런가 보다 했다.




하루는 같은 수업에서 옆 자리에 배정된 친구 하나가, 늘 레쓰비를 드시네요. 하고 물었다. 커피 좋아하세요? 아뇨, 잘 못 마셔요. 짧은 대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교수님이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1시간 반의 수업 동안 레쓰비를 천천히, 야금야금, 오물오물 마셨다. 달고 쓴 맛이 입 안에 충분히 스며들 만큼, 데굴, 데굴. 배고픈 건 여전했지만, 입에 단 맛이 돌 때는 그럭저럭 버틸만한 탓이다.




몇 번의 수업 이후였을까, 그 뒤로 목례를 하거나 간단한 과제물의 여부를 묻던 옆 자리의 학생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커피 싫어하시면서 왜 그렇게 매번 드세요? 아.. 잠이 많아서요. 커피를 진짜 싫어하시긴 하나 봐요. 그 작은 캔을 수업 내내 드시던데. 하하. 그러게요. 문득 머쓱해진 나는 레쓰비 한 캔을 꿀꺽, 꿀꺽하고 단숨에 넘겼다. 약간은 놀란 눈치로, 한 번에 다 드신 거예요? 하고 묻는다. 그러게요. 하하. 멋쩍은 기분이 든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되고, 입 안에는 단 맛도 쓴 맛도 금세 사라져 배고픔만 가득이다.



돈이 없었던 시간은 그런 시간이었다. 레쓰비 한 캔을 나눠 마시다가, 누군가 레쓰비 한 캔에 대해 물으면 허장성세를 부려 몸을 잔뜩 부풀렸던 시간. 통장에 돈이 없으면 다음 달에 빚을 내서라도 돈을 준비해야 했던 시간. 어른이 된 이들에겐 늘 당연했을 일들. 옆자리의 친구는, 다음 시간에 스타벅스 더블샷 캔을 사다주며 말했다. 이게 더 맛있어요. 내 책상 위에는 레쓰비와 스타벅스 캔이 같이 놓였다.




그렇다고 내가 늘 돈이 없는 일들에 부끄러워 숨기던 것은 아니었다. 그 친구와는 그 수업 이후로 마주친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그 수업 내내 내게 종종 캔커피를 나누어 주곤 했다. 티가 났던 걸까. 잘 모르겠다. 레쓰비 한 캔에 쓰는 마음 씀씀이 덕분에 돈이 없어 힘들었던 시간 중 조금이 편안했던 것이 무척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나는 레쓰비 6캔어치의 돈을 모아 학교 카페의 카페라떼를 사다 주었다. 시험 잘 보세요. 큰돈이 아니었지만, 세 끼의 식비이기도 했다. 누가 보면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내가 그 친구의 마음 씀씀이에 답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늘, 마음을 쓰는 것은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작고 사소한 것을 가만히 헤아려 보는 것. 그리고 마음을 갚는 일 역시 그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조금 불편하고 힘들어지는 시간 앞에서도 기꺼운 마음으로 상대에게 나누는 것. 어쩌면 그 학기 내내 배운 수업내용보다, 그 친구의 친절이 내게는 훨씬 오랜 배움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그래서 때로는 나눈 마음에 힘들어지더라도, 헉헉대며 빠듯해지더라도 좋았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뒤로 무리한다는 말이 싫지 않아 졌다. 그래서 지금도 레쓰비를 보면 그 친구 생각이 난다. 작은 친절이, 옆에서 내내 후루룩 거리는 소리를 참아주었던 배려가, 웃는 얼굴로 작은 보답에 인사해 주었던 예의가. 나 역시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게 무척이나 어려운 일임을 알게 된 것은, 조금 더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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