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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Oct 07. 2019

이삿짐 정리

지우고, 버리는 일

이삿짐을 정리하다 보면 썩 달갑지 않은 것들이 있다. 분명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던 것들. 이를테면 헤진 편지봉투라거나, 포장을 뜯지 않은 선물 같은 것. 분리수거를 하면서 생각한다. 이렇게 잊힐 것들이 한때는 얼마나 소중했던 것인가. 아낀답시고 꼭꼭 쟁여두더니만. 의미가 있을 땐 숨겨두다가 의미가 없어지고 쓰레기통에 가야 할 때가 되어서야 나타난다.



잊혀지는게 가장 무서웠던 시간이 있었다. 그건 비교적 또렷한 기억이다. 요새는, 기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까맣고 굵은 매직으로 이름을 한 줄씩 위에서 부터 죽 죽 긋다 보면, 이름은 읽을 수 없는 그저 새까만 네모칸이 될 것이다. 지나간 모든 자리에 그런 네모칸이 되어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좋아했던 사람도, 내가 좋아했던 사람도.



분리수거통을 비우며, 빽빽이 둘러싼 아파트 단지를 본다. 한 칸에 사람 하나, 둘, 혹은 셋, 또는 넷, 더러는 다섯, 내지는 여섯. 더 적고 많은 사람들. 제각기 색으로 빛나는 거실의 형광등 불빛이 베란다를 타고 나와 밤거리를 반짝인다. 명멸하는 저 빛처럼, 전구가 꺼지고 나면 나도 새까매 지고 싶다. 재조차 남지 않게, 누구의 가슴에도 그을음 한 점 없이. 다만 내 가슴에만 잔뜩, 남의 그을음이 남아있었으면 싶다. 새까맣게 칠한 이름에 명암이 도드라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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