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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r 31. 2017

말의 목적

Watch your mouth


원치 않는 소음이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을 할퀼 때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이 힘겨웠다. 불가함을 알면서도 침묵을 재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간절히 바라곤 했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다물 수 있는데 귀는 어찌 내 뜻으로 틀어막을 수 없는지 울화가 치밀었다. 나는 왜 소리로부터 단절될 수 없나, 그것은 왜 허락되지 않았나. 들린다는 사실마저 원망스러울 때면 눈물 속에라도 잠기고 싶었다.



사람들은 왜 스스로를 설명하고, 이해받고, 증명하기 위해 애쓸까?



듣고 싶지 않은 말에 대한 반발은 그 뿌리를 묻는 의문이 되었다. 왜 사람들은 묻지도 않은 일을 알려주고 설명하고, 그리하여 자신의 방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애쓰는지- 궁금했다. 어째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생각을 끊임없이 공유하려는 걸까.






세 개의 '나'가 있다. 진짜(라고 생각하는) '나', 내가 바라는 '나', 타인의 눈에 비친 '나'.


사람들은 나를 자주 오해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만든, 의도한 오해로 여즉 알고도 내버려 둔 종류의 것이었다. 그들이 말하는 '나'는 내가 만들어낸 나, 보여준 나, 바라는 나의 모습에 가까웠다.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었다. 말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표현 수단으로 의사를 전달하고, 나를 표출하고, 의견을 납득시키는 데 효율적이다. 사람은 '알려주고 싶은' 자신을 어필함으로써 타인에게 스스로가 바라는 이상향의 모습을 각인시키고 확립시키려는지도 모른다. 의사 전달, 자기변명과 합리화, 의견 조율과 합의점 도출 등의 탈을 쓰기는 하지만 결국엔 모두가 이상화된 자신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인지도. 그렇다면, 대화는 언제 껄끄러워질까?





자신을 표현/전달하는 '말'에는 필연적으로 청자(너, 객체)와 화자(나, 주체)가 필요하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둘이 동등한 위치에 서지 않는다는 점이다. 화자는 자발적 주체성과 능동성을 가지는 반면 청자는 타자성과 강제성의 지배를 받고 수동적인 위치를 벗어나지 못한다. 정체성을 강화시키고, 타인에게 인정과 이해를 구하고, 자아를 규정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공고히 하는 '말하는' 행위의 주체는 언제나 화자다. 그 일방성으로 인해 언어는 쉽게 '폭력'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말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인간의 뿌리 깊은 자기 표출의 욕구를 생각할 때 경청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호의의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나'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을 할애하고 노력과 관심을 기울이는 청자를 충분히 배려하고 존중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필요하다. 스스로의 말하기 방식을 돌이켜보자. 우리는 듣는 이를 충분히 고려하고 있는가? 말하고자 하는 욕망이 지나쳐 타인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이기적인 목적으로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상처주지는 않았나-.


소리의 형태로 입 밖으로 쏟아진 생각은 타인과 관계를 맺고 세계에 영향을 끼친다. 듣지 않을 권리를 가졌지만 우리의 말을 경청하는, 선의의 청자가 가지는 최선의 선택이 수동적 방어의 형태일진대 우리에게는 그들을 보호할 의무가 존재한다. 하고 싶은 말만 앞다투어 쏟아내는 일에 회의감이 들고, 배려 없는 말을 듣는 일에 진저리가 날 때면 말의 목적과 함께 '나'의 화법을 반추했다. 그 치와 별 다를 바 없이 쌓인 말을 해소하는 일에 맹목적인 나는 끔찍한 화자이자 청자였다. 대화는 일종의 암묵적인 합의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와의 대화(혹은 관계)가 매끄럽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한 번쯤 그대의 태도를 돌이켜보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소통이 아닌 강요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당신이 하고 있는 말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최근엔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약화시키고 인정받고 정의하기를 멈추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말하지 않기'를 연습 중이다. 부글대는 말은 힘겹게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말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곱절은 더 어렵다. 스스로의 바람이야 어찌 되었든 하고 싶은 말의 양은 정해져 있는 모양인지, 말을 줄인 대신 SNS에 메아리 없는 외침을 열심히 지껄이게 되었다. 무어라도, 어떤 형태로도 뱉어내지 않으면 견 수 없는 그릇이 작은 인간이라 그런가 보다. 그래도 언젠가는 열심히 듣고, 잘 말하는 사람이 되어 보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추가했다. 아직 갈 길이 깜깜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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