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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pr 25.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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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끝에 몸을 누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자립(自立)은 아직이지만 주거 측면에서의 독립(獨立)은 일찍 했다.



나는 열일곱에 집을 나왔다. 통학을 하기엔 집이 멀었기 때문인데, 의도한 바는 아니나 어쨌든 평균보다 조금 일찍 엄마 품을 떠난 셈이다. 초등학교 수련회 같은 걸 가서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친구들 말에 물음표만 띄우던 무심한 성정은 자라는 동안 그대로여서 딱히 보살핌 같은 걸 그리워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의 생활이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으므로 그 책임의 무게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았던 것 같다.


그 해 봄 이후로 나는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다. 학기마다, 혹은 1년이나 2년 간의 계약이 끝날 때마다 폴짝폴짝. 교칙에 등 떠밀려 따라야 했던 때도 있고 보증금과 월세 따위를 저울질 해 자의 아닌 자의로 선택했던 공간도 있다. 어느 곳이든 일정 기간 후에는 떠날 것이 예정되어 있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떠날 것을 염두 해두고 살았다. 못 하나 마음대로 박을 수 없으니 내 집이라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하루의 끝에 웅크려 잠들 곳이지만 일시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여행을 시작하고는 머무는 곳이 바뀌는 주기가 더 짧아졌다. 엄마 집은 이따금 머물다 올 뿐이니 저대로 '집'의 개념과는 멀어져 갔다. 그래서 내겐 든든한 홈그라운드 같은, 집(Home) 같은 집(House)이 없었다. 없다고 생각했다.



Varanasi, India (2016)



집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재작년, 꼬박 두 달을 머문 인도의 허름한 방을 떠나던 날이었다. 내 소유의 물건을 말끔히 치운 방은 낯설고 허전했다. 언제나 떠날 때면 (한동안 나의 것인 양 굴었던) 정든 방을 마치 다음 사람에게 빼앗긴 것 같아 괜한 질투가 나곤 했는데, 이번엔 어쩐지 그런 종류의 서글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어떤 확신과 평안을 느꼈다. 나의 흔적은 모두 지워졌지만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다는, 그러므로 이다음에 누가 머물게 되더라도 이 곳은 언제까지고 나의 방이라는 느낌.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떠나는 일도 쓸쓸하지 않았다. 힐긋 돌아본 방에는 지난 두 달간의 시간과 기억, 허술한 창 틈으로 쏟아지던 어느 아침의 햇살마저 고스란했다.


계단을 오르고 자물쇠를 벗기고 문을 열어젖히면 펼쳐지던-

서먹하고도 익숙한, 나의 집.






그리고 사흘 뒤 도착한 방콕에서 나는 벽면을 가득 채운 나의 흔적을 다시 마주했다. 색이 조금 빠진 티셔츠, 나무 벽을 따라 늘어놓은 세면도구, 침대 머리맡의 책, 익숙한 샴푸 냄새 따위로 가득 찬 작은 방은 하루가 채 지나기도 전에 나의 집이 되어 있었다. 어리둥절한 눈으로 생경한 방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아, 나는 언제고 나로 가득해서 내가 가는 곳은 어디든 나의 집이 되는구나.  


자각하지 못하던 때에도 낯선 골목을 온종일 헤매고 생소한 향기를 품은 채 돌아온 곳은,

언제나 이었다.











그것이 어디든 해가 저물면 돌아가고 싶은 걸 보니 인간에게는 확실히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그 날 이후로


비록 지나쳐 온 '집'에 대한 실제적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히 나의 집이다. 


하는 사뭇 감성적이고 정겨운 생각을 갖게 되었다. 웅크렸던 날들과 그때의 고민, 그 속의 내가 이리도 생생한데 돌아갈 수 없다고 해서 그곳을 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 곧 1년간의 호주 생활을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당장은 엄마 집에 짐을 풀겠지만, 다음이 어디가 될지는 나도 알 수가 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에게는 소유한 집이 없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가벼이 떠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집이 없으므로 어디든 '집'이 될 수 있다. 나의 거주지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넓디넓다. 그렇게 생각해두곤 기분이 좋아져 허리를 곧추세웠다. 가진 것이 없어 가질 것이 많고, 지킬 것이 없어 자유롭다 말하면 역시 너무 나이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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