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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01. 2017

수신인 미상

편지는 연필로 쓰고, 우표는 붙이지 마세요


5분만, 5분만 더-. 자꾸만 미루다가 1시 45분이 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달리는 것이 대개 하루의 마무리이자 술자리의 마감이었다. 새벽녘의 전력질주는 순전히 기숙사 통금 시간 때문이었는데 우르르 뛰쳐나왔어도 나는 확연히 걸음이 느려서 종종걸음으로 달리다 고개를 들면 다리 긴 남자애들이 성큼성큼 달려 저만치 앞서 있곤 했다. 연신 시계를 들여다보며 ‘같이 가!’ 애절하게 외쳐도 그다지 돌아보는 애는 없었다. 씩씩 숨을 몰아쉬며 아슬아슬하게 기숙사 문을 통과하면 애들은 벌써 제 방에 들어갔는지, 꽁무니도 보이질 않았다. 으이구- 저런 걸 친구라고. 구시렁대며 침대로 기어들면 피식 웃음이 났다. 마냥 즐거운 시절이었다.           


수업과 공강은 물론, 하고 많은 밤과 주말까지 함께 했던 동기들은 2학년이 되자 죄다 군대를 갔다. 밤새 과제도 하고 학교 앞 PC방, 당구장, 노래방을 제 집처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지 그 애들 없는 학교생활은 생각보다 훨씬 더 허전했다. 몇 없는 여자 동기들과 모이면 그 애들을 그리워하느라 시간을 많이 썼다. 고스란히 느껴지는 빈자리가 마냥 슬펐다. 그 후 이 년 남짓 나름의 최선으로 그 애들을 챙겼다. 편지도 여럿 쓰고 없는 시간 쪼개어 오래도록 통화했으며 돌아가며 나오는 휴가엔 꼭꼭 챙겨 얼굴을 봤다. 동기사랑은 나라 사랑이라는 말은 도대체 누가 한 건지. 구시대 유물 같은 표어에다 애국심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누가 뭘 그리 유난이냐 물으면 그리 대답했다. 더없이 소중한 친구들이었다.      

    

그땐 이 년만 기다리면 다시 함께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남은 대학생활은 그 후로 영원히 엇갈렸다. 그 애들이 제대를 할 때쯤엔 내가 휴학을 했다. 1년을 쉬고 돌아오니 이미 저마다 자리를 잡고 있어서 끼어들 새가 없었다. 저네들끼리 잘 노는 것이 어색하고 괜히 서운하기도 해서 한동안 혼자 겉돌았다. 동기고 나라고 사랑해봐야 소용없다는 하소연도 자주 했다. 날이 지나 하나, 둘 연인이 생기니 얼굴 보기는 더 힘들어졌다. 이러다 결혼하면 생사도 모르고 살겠다며 장난처럼 투덜대는 동안 우리는 정말로 뜸해지고 멀어져서 이따금 SNS에 좋아요나 누르는 사이가 되었다.      


이젠 마지막으로 얼굴 본 게 언제인지마저 까마득한데도 여전히 그 애들이 시시때때로 그립다. 바쁘진 않을까, 귀찮진 않을까 시답잖은 핑계와 변명으로 연락을 망설이는 동안 선뜻 전화를 걸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래도 좋은 세상이라, 아쉬운 대로 근황이 궁금할 땐 SNS를 뒤져본다. 얼마 전에는 졸업을 했더라. 학사모를 쓴 모습들이 번듯해서 기분이 좋았다. 다들 잘 하겠지, 잘 되어라 홀로 응원을 했다. 처음 만나던 시절에는 상상도 못 했던 길, 각자의 방향으로 저마다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자랑스러운 내 친구들. 기억 속 어딘가 파묻혀있을 쑥스럼 많은 옛 친구의 수신인 없는 그리움은 이번에도 닿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따금 만나면 연락 좀 자주 하라며 불평이나 했지만 사실은 오랜만에 만나도 어색하지 않은 너희가 참 고맙다. 군대 간 친구에게 편지 같은 건 쓰는 게 아니라며 잘난 척 떠들어도 사실은 그때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걸 싶다. 오랜만에 업로드한 사진 밑에 달린 보고 싶다는 댓글에 마음이 찡하다. 나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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