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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07. 2017

계란 스매시

누가 노력을 안 한다고요?


친구 A가 일하는 가게의 오픈 시간이 늦어졌다. 인원도 그대로, 해야 할 일도 그대로다. 이건 아무리 봐도 줄어든 시간 안에 피고용자끼리 알아서 더 열심히(죽어라-) 하란 걸로 밖엔 안 보인다. 모두 분통을 터뜨렸지만 '일단' 해보라는 것이 사장의 대답이었다. 이미 빠듯한 일손이지만 사람들은 더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여 주어진 일을 해 낼 거다. 문제다. 불합리한 요구는 거절되어 마땅하다. 그러나 스스로를 을의 자리에 두는 것이 너무도 익숙한 우리는, 갑의 요구에 맞춰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우리는, 못한다는 말 대신 뼈를 깎아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기적을 만든다. 체력도 정신도 한계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이거다. 거봐, 되잖아.



기업의 욕망을 노동자의 노력으로 만회하려는 사회



내가 느끼는 한국은 그렇다.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스펙을 만들어서 비정규직으로 (겨우) 취직하고 과도한 업무를 부여받아 저녁도 주말도 없이 잠까지 줄여가며 일하다가 쥐꼬리 같은 월급으로 손바닥만 한 방의 월세를 내고 일주일에 6일은 친구도 연인도 가족도 건강도 꿈도 미래도 잊은 채 산다. 숨이 턱턱 막히지만 앞집 사는 B도, 대학 동기 C도, 회사 선배 D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고 다들 그렇게 사니까 더럽고 치사해도 한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서 도태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버티는 동안 삶의 질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소명의식은 무슨, 의욕마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약육강식의 지배를 받는 사회에서 기업은 불합리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먹이사슬의 바닥 어드메를 오르내리는 나의 목소리는 혀 끝을 벗어나자마자 땅으로 고꾸라지기 일쑤다.






지난주엔 어쩌다 떠올리면 울화통이 먼저 터지는 불합리한 노동환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안 바뀌어. 영원히 안 바뀔 걸.



대뜸 E가 단정 지었다. 한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에 말문이 막혔다. 구겨진 미간을 애써 다림질하고 입 속을 잘근대다가 퉁명스레 답했다.



-영원히는 아닐 거야. 기득권이 갑질 하는 구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아냐. 기업 입장에선 아쉬울 게 없어. 저항하면 내쫓으면 되지. 대체될 인원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걸 한번 바꿔 보겠다고 사람들이 추운 날, 더운 날 없이 거리로 나가는 거잖아.


박근혜 내려오고 나서 시위 없는데? 사람 본성이 그런 거야. 나한테 피해 오는 건 다들 피하지. 대신 누군가 해주길 바라는데 그렇게 미루다 보니 소수의 사람들만 시위를 하게 되고, 소수의 의견은 쉽게 묵살돼. 그러니까 바뀔 수 없는 거야. 기술 발전으로 사회는 자동화되어가는데 기업이 무서울 게 뭐가 있겠어? 아쉬울 게 없는데.



어처구니없는 논리에 한숨이 먼저 나왔다. 크고 작은 시위는 박 전 대통령 이전에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다. 관심이 없어 모르는 걸 남들도 안 한다고 말해선 안 되는 거잖아. 무어라 반박하려다 말고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래도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어.


그래, 그런 사람들- 존중하지. 그런데 작은 물결로 바꾸기엔 한계가 있어. 바위에 계란 던지는 기분이라고.


-그래도 던져야지, 안 할 순 없잖아.


우린 책임질 게 없는 젊음이니까 쉽게 말할 수 있지.



치기가 올랐다.



-책임질 것 없는 젊은 우리가 하면 되겠네.


아,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성향 차이라고 생각해. 나는 욕하면서도 적응하며 사는 스타일이고, 솔직히 박근혜 탄핵되든 말든 관심 없었어. 원래 피부에 안 와 닿으면 그렇지 뭐.



대화는 여기서 끝났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뭐라도 바꾸려는 시도는 해봤을까? 기운이 빠졌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꿈꾸는 가능성을 멋대로 판단해서는 안되었다. 화가 났다. 네가 안 한다고 모두가 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힘을 실어주지는 못할망정 누군가의 노력을 폄하해서는 안되잖아. 그 누군가가 가져올 미래를 너도 누릴 거잖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



재외국민 투표 기간은 지난 4월 25일부터 30일 까지였다. 내 주변의 사람들은 죄다 투표를 안 했다. 누구는 '아, 신청을 해야 해요?' 어리숙하게 되물어왔고 4년 전에 이민을 온 누구는 '저 그런데 관심 없어요.' 아주 당당하게 말해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서른 후반의 누구는 투표했냐는 물음에 당연한 듯 '나 그런 거 안 해. 한 번도 한 적 없는데?' 했다. 맥이 탁 풀렸다. 아니- 한 번도 국민의 주권을 행사한 적이 없는 사람과 권리를 찾는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었다니. 너희는 박근혜 욕할 자격도 없어. 쏘아붙였더니 '욕 안 하는데?' 했다. 아- 무슨 말을 더 했어야 할까? 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서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다수결이라는 뚜렷한 오류를 가진 원리 위에 세워진 선거제도는 필연적으로 허점 투성이다. 다수의 의견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며, 어쩌다 다수의 편에 서게 된다면 목소리에 힘이 실리기도 하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의견을 넘어 존재 자체가 묵살되고 비난받는 일도 흔하다. 심지어는 주도권을 거머쥔 다수로부터 결과에 승복하라는 폭력적인 메시지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승부를 가리는 스포츠도, 편 가르기도 아니다. 여기엔 승자도 패자도 없어야 한다.


선거에서 나의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그러나 이 불만족스러운 구조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빠르고 직접적인 것이 투표라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개인적으로 미래를 추구하는 데 있어 가장 지양해야 할 태도는 바뀌지 않을 거라는 확신으로 저항을 포기하고 부조리에 순응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가능성을 믿지 않는 불평과 불만만큼 소비적이기만 한 것이 있을까. 희망하기를 멈춘 인간에게는 꿈도 미래도 없다. 지금 당장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조금 더 나아지리라는 희망, 그것을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일의 열쇠는 포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 절구도 갈면 바늘이 되고, 모종삽으로도 태산을 옮길 수 있다. 던지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계란으로도 바위는 깨질 것이다. 그 언젠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포기하지 않을 때, 삶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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