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잉지 Mar 08. 2017

너와 나의 사정

우리는 복잡한 존재이니까


선인장을 죽였다



2009.XX


고등학교 3학년쯤이었다. 제 몸만 한 화분까지 합해도 겨우 손바닥만 한 작은 선인장이었다. 종종 야자가 끝나면 가곤 하던 대형마트에서 샀는지, 주말에 집에 가는 길에 작은 꽃집에 들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하튼 기숙사 열람실 책상에 올라앉은 녀석은 곧 나의 작은 기쁨이 되었다. 무언가를 돌보거나 기른 경험이 전무한 시절이었다. 선인장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한 달에 한번 물을 줘야 해' 하던 판매자의 당부가 전부였다. 혹여 잊을까, 탁상달력에 요란스레 별까지 그려두고 꼬박꼬박 물을 챙겼다. 어디서 식물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면 잘 자란다는 연구 결과를 읽고 와선 매일 보드라운 가시를 쓰다듬으며 '잘 있었어?'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서너 달 쯤 지났을까, 여느 날처럼 '나 다녀왔어' 심심한 인사를 건네며 가만히 선인장을 쓰다듬는데 불현듯 휘청, 뿌리가 흔들렸다. 잘못 느꼈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잊지 않고 물도 줬고, 매일 다정한 말로 인사도 건넸는 걸. 그 후 며칠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채 바라보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건 알아챘지만 마주하기는 두려웠던 모양이다. 그렇게 한 주를 끝내고 돌아온 일요일 저녁에야 선인장을 들여다볼 용기를 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조심조심, 밑동을 쓸어 올리는 순간 후두둑- 줄기가 끊어지더니 까맣게 썩은 둥지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입을 틀어막았다. 애정을 담뿍 쏟은 선인장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닿을 곳 없는 사과의 말을 연신 읊조리며 친구와 작은 장례(?)를 치러주고서 책상에 앉아 생각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2015.12


강 건너 카페에 간 날이었다. 커다란 창 밖으로 서서히 해가 저물었고 카페에는 잔잔한 팝과 재즈가 흘렀다. 시집을 읽다 마음에 드는 시구를 발견해 냅킨에 받아쓰고, 반대쪽에서 잡기 쉽도록 머그의 손잡이를 왼쪽으로 돌려두던 참이었다. 별안간 나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배려하는 방법이 '내가 받고 싶은 것'과 꼭 같은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헤어짐으로 끝맺은 지난 연애와 멀어진 사람들이 우수수 떠올랐다. 돌이켜보니 나는 누구에게나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을 주었더라. 그들이 원하는 사랑은 생각도 못하고. 아- 그때 들이 받고 싶었던 사랑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나를 대하던 모습에 받고 싶은 사랑의 단서가 숨겨져 있지는 않았을까?



Varanasi, India (2015)



눈치를 많이 본 달까, 남 신경을 많이 쓴 달까 여하튼 어려서부터 역지사지를 습관처럼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도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면 그럭저럭 납득할 만했고 대개 관용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것이 불완전한 가정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었다는 건, 뒤늦게야 깨달았다.



2016.01


돌아가기로 한 날이 보름쯤 남았을 때,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엄마를 두고 갑작스레 한 달이 조금 넘도록 일정을 늘렸다. 우물쭈물 그 소식을 전하니 엄마는 불같이 화를 내며 물었다. 엄마 생각은 한 번이라도 해봤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비행기 표를 찢어버리기에 앞서 가장 마음에 걸렸던 것은 엄마였다. 그래서 엄마의 입장이 되어 머리에 쥐가 나도록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런 후에 내린 결론이었다. 엄마가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온전히 착각이었다. 예상과 달리 엄마는 노발대발 화부터 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문제는 '내가 엄마라면-'이라는 가정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닌데. 잘못된 가정에서 나온 결론이니 오류는 당연했다. 나는 '엄마가 엄마일 때'를 생각했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나의 역할극은 불완전하며 이해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더욱더 세심하고 깊은 배려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보편적 공감으로 충분했으나, 지극히 개인적이고 특수한 상황들에서는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조금 더 내밀한 (개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많은 경우 그 경지에 닿을 수 없었고, 스스로의 허술함으로 알면서도 간과하는 경우마저 허다했으므로 선의라도 멋대로 타인의 입장 서고 넘겨짚고 판단하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다. 그러나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던가-.



2016.12


하나뿐인 내 동생은 올해 대학을 졸업했다. 전공을 살릴 생각은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다고 했다. 하고 싶은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까 대충 아무거나 할 거라는 말이 그렇게 슬펐다. 나에겐 썩 잘하진 못해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든 안되든 해보려는 마음도 있으니까. 안타까웠다. 사실 하고 싶은 게 있는데 실현이 어려우니까 외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다는 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잘하지 못해도 하고 싶은 일은 있을 거라고 멋대로 생각했다. 그래서 괜한 오지랖을 부렸다. 무엇을 선택해도 그것이 원하는 바라면 나는 너를 응원할 테지만, 어렵다거나 힘들다거나 늦었다이유로 외면하지는 말라고. 잘난 척 충고를 늘어놓았다. 네 마음을 잘 들여다보라고, 사실은 하고 싶은 일이 있지 않냐고 다그치기도 했다. 대단하지 않아도 괜찮다, 잘하지 못해도 괜찮다 말하면서 나는 그녀의 선택을 부정했다. 너의 최선은 최선의 것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말하고 있었던 거다. 바보같이.


나의 실수를 넌지시 알려준 건 J였다. 나는 어리석어서 생각을 해두고도 잊는 일이 잦고, 그는 이따금 내가 간과한 것을 일깨워준다. '다 자란 나무의 시선으로 소중히 일러주기 이전에 흙의 마음을 이해해 줄 수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더 아름다울 것 같아. 사랑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좀 더 깊게 바라보자' 하는 그의 메시지를 받고서야 아차 싶었다. 나는 이번에도 스스로의 기준을 저버리지 못하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던 거다. 그제야 동생의 입장에 서보니 잘하는 것이 없다 생각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철없는 언니는 돌아올 생각을 않고 대단한 조력자나 지지자도 없는 채, 그래도 먹고살아야겠다며 방법을 강구했을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동생의 마음을 떠올리니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어리석은 충고는 나름의 고민 끝에 내렸을 동생의 결정을 미숙한 것으로 치부한 것인 동시에 그녀의 의사를 무시하는 처사 밖에는 못되었다. 꿈을 가지라는 꿈같은 말조차 강요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애가 정한 최선을 멋대로 의심하고 판단해서는 안되었다. 부끄러웠다. 동생의 최선을 으스대며 가르친 내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내가 주고 싶은 것과 네가 받고 싶은 것



어쩌면 모든 관계의 삐걱거림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주고 싶은 것과 네가 받고 싶은 것 사이의 격. 나의 다정함은, 나의 사랑은, 나의 배려와 관심, 최선은 늘 애꿎은 방향을 향해 커져 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인장에게 필요한 것은 '한 달에 한 번 물'이 다가 아니었다. 그 애는 햇빛이 필요했다. 하루 온종일 블라인드가 쳐진 열람실에서는 잘 자랄 수 없었던 거다. 나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줬지만 선인장이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 쓰질 않았다. 사막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자라는 그 애를 그늘진 열람실에 가둬두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사람을 이해하려 할 때는 '나'를 '그의 입장'에 대입하여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지난 생을 수용하는 일에 골몰해야 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는 내가 받고 싶은 사랑보다도 상대가 받고 싶은 사랑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했다.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부터 그가 원하는 바를 알아챌 수 있었다면- 나는 조금 더 제대로 사랑할 수 있었을까.



나는 아직도 남을 대하는 일과 나를 대하는 일에 서툴러서 자꾸만 같은 실수를 저지른다. 이렇게 말해두고도 어느 날은 또 실수를 되풀이하기도 할 거다. 어쩌면 이해한다는 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를 지우고 '너'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는 중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조금 더 명료하게 얘기해 볼까. y=ax+b라는 일차방정식을 하나의 상황이라고 하자. 변수 x를 개인이라 하면 y를 사건에 대한 결과와 이해라고 볼 수 있겠다. x에 누가 들어가더라도 동일한 y는 도출될 수 없다. 누구도 네가 될 수 없고 우리는 1과 2보다 훨씬 복잡한 존재이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그대 사랑이 짝사랑은 아니었음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