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건강만 하소서
엄마가 아프다고 했다.
한동안 뜸하다 걸려온 전화를 통해 들은 말이 그랬다. 말문이 막혔다.
엄마 가슴에 생긴 것은 유선종이라고 했다. 종양의 한 종류란다. 처음 그것이 만져졌을 땐 생리 때면 생기곤 하는 몽우리겠거니 생각했단다. 그 후엔 곧 사라지겠지 싶어 두고 보았다고 했다. 이상한데, 이상한데 하면서도 삼주가 넘도록 병원을 미루었단다. 없어지겠지, 없어지겠지 괜한 희망이 한몫을 했을 거다. 그러면서도 커지는 불안감에 어쩔 수 없이 망망했을 거다. 서툴게 인터넷 검색 따위를 했을지도 모른다. 유방암이면 어쩌지, 이미 손쓸 수 없으면 어쩌지, 발목을 붙잡는 검은 상상들이 두려워 마음고생도 심했을 거다. 조직검사를 해두고 왔다는 엄마는, 큰일 아니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내게 전화를 걸어 주섬주섬 그런 이야기를 했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니-
장난처럼 진심을 풀어놓는가 했더니 이젠 괜찮다며, 재빨리 엄살 아닌 엄살을 주워 담았다. 그래도 수술은 해야 된다더라, 볼멘소리를 하는가 했더니 서둘러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엉겁결에 '응-' 하고 끊으려다가 멈칫, 전화통 너머로 사라지려는 엄마를 다시 불러 세웠다. 안녕을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큰 병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그간 무거웠던 마음과 여전히 남은 불안감 같은 것이 울컥 눈물로 치받았을 거다. 어찌할 줄 모르겠는 마음에 온몸을 조여드는 깊은 한 숨을 너털, 웃음으로 숨기며 어휴, 울긴 왜 울어 장난 같은 타박을 했다. 엄마는 폭삭 젖은 목소리로 딸 목소리 들으니 좋아서 그러지-, 해놓고서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좋은데 울긴 왜 울어, 울긴 왜 울어 반복하면서 나도 말을 잃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명치 반 뼘 아래쯤 생겨난 깊은 구멍이 소용돌이치며 모든 단어를 빨아들이는 것 같았다. 슬픔과 무기력과 한스러움이 뒤섞이며 요동을 쳤다. 지금 이 순간, 전화기 이 편에 멀뚱 숨 쉬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무릎 께에 놓여있을 손을 잡아줄 수도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닦아줄 수도 없었다. 묵묵히 지켜봐 줄 수도 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무엇도 기억나지 않았다. 고작 비행기 열몇 시간의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지기는 처음이었다.
늙어가는 엄마가 아픈 것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그 순간 가장 끔찍했던 건, 언젠가 미래에 다시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에도 엄마 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나였다. 그 순간을 위해 머물 생각이 없는 나. 언제나처럼 내 삶이 최우선인 나.
그 날 저녁엔 재작년 태국에 갈 때 적어둔 글* 한 편을 엄마에게 보냈다. 요즘은 글을 쓰지 않느냐는 엄마의 물음을 반년이 넘도록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기던 차였다. 괜히 멋쩍어 무심한 척 덧붙였다.
엄마, 이 글 만명도 넘게 읽었어. 심심할 때 한 번 읽어봐. 우리 이야기야.
도대체 몇 번을 읽는지, 1이 사라지고도 한참 후에야 엄마는 답장을 보내왔다.
딸이 엄마 사랑하는 마음을 이 글을 읽으니 알겠네. 우리 딸 말이 없어 표현을 못할 뿐이지, 엄마 사랑을 모두 기억하고 있구나. 딸, 엄마는 내 딸들 잘 키웠다고 믿는다. 사랑해. 하늘만큼 땅만큼.
그 잘난 마음 말도 못 해서, 글로나 전하는 못난 딸을 하늘만큼 땅만큼이나 사랑한다고 말하는 엄마.
와중에 여태 짝사랑인 줄 알았네, 하는 말이 철썩 귓불을 때렸다.
엄마, 오랜 세월 그 사랑이 짝사랑인 줄로만 알게 해서 미안해.
그러나 한 순간도 그대 사랑이 짝사랑은 아니었음을 늦게나마 고백할게(알아줘).
엄마의 수술은 잘 끝났고요, 지금은 몸도 마음도 (표면상으로는) 회복을 끝낸 것 같습니다. 작년 생일부터는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종종 엄마에게 꽃다발을 보내고 있어요. 그리 좋아하시는 꽃 이제 당신 손으로 사게 하지는 않으려고요. 꽃이 도착한 날이면 매번 거실 장식장 옆에 정성스레 꽂아두고 사진을 찍어 보내주시는 것이 기뻐서라도 꽃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신 가까이 머무르지 못해도, 사랑하고 있음은 숨기지 않으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