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 알렉산드로 보파
1. 우리는 타자를 상상할 수 있는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자주 떠올린 화두는 각자의 세계에 갇힌 존재의 편협함과 상상력의 빈곤이었다. 수많은 비스코비츠의 삶이 인간세계를 풍자한다기보다 인간이 인간중심적 관점으로 그들의 세계를 한정 지어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인상을 더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로 보파는 동물에게 이름을 주고 동물의 관점인 양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그의 이야기에서 동물들은 철저히 대상화/타자화 되어 있다. 그는 왜 모든 동물에게 같은 이름과 비슷한 역할을 줬을까? 개성을 잃고 물체화/재산화 된 존재가 진정한 개인이 될 수 있는가?
그는 동물의 삶을 상상하는 데 실패했다. 자, 이제 질문을 바꿔보자.
2. 우리는 타자를 이해할 수 있는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상상에 의존한다. 그렇다면 상상은 타자의 본질에 어디까지 가까워질 수 있는가? 나는 이 책의 한계를 마주하며 타자에 관한 상상과 이해, 수용의 가능성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럼에도 이 글의 제목을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라 쓰지 않고, ‘불가능한 불가능’이라 쓴 것은 이해가 불가능의 영역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가능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불가능으로 남는다. 가능한 것은 불가능의 범주에 속할 수 없다. 영원히,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 이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를 정확히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비로소 이해는 시작된다.
이것은 비극의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발점이다.
3. 이해란 무엇인가: 불가능의 가능성
자, 지금쯤 다들 게슈탈트 붕괴가 오기 시작했겠지. 좋아. 조금 무너진 채로 불가능의 불가능성을 직시하며, 그럼에도 불가능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불가능한 자리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뻗는 일은 틀림없이 투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목숨 같은 자아를 기꺼이 내던지고 너를 이해하러 달려간다. 그러니까 ‘차이 존중’ 따위의 허울 좋은 몰이해는 집어치우기 바란다. 불가능한 불가능에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 불가능의 무한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조금 더 가기도, 조금 덜 가기도, 아주 틀리기도 하면서 가깝거나 먼 자리에서 타자를 헤아려보는 것,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것. 거기에 불가능의 가능성이 있다.
나는 어제와 조금 다른 자리에서 너를 오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