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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r 01. 2022

그만두지 않는 법

《활활발발》, 어딘

책을 또 핑계 삼기로 했다.     


책은 내 유구한 핑곗거리였다. 떠나고 싶을 때, 변화가 필요할 때, 도망치고 싶을 때, 심지어 직업이 필요했을 때도 나는 책에 들러붙었다. 아주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내가 책이었다면 아주 지긋지긋했을 것 같다. 허구한 날 이름을 팔아먹고 들러붙는데 누가 달갑겠냐고. 그럼에도 또 책을 핑계 삼기로 했다. 이번엔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근엔 사랑하는 친구들이 글방에 나가기 시작했다. 며칠을 골똘히 생각하고 온종일 마른세수를 하는가 했더니 뚝딱뚝딱 멋진 글들을 써서 내게도 건네주었다. 글로 나누는 세계는 말로 나누는 세계와 다르다. 활자로 쓰인 그와의 간극 속에서 그간 알아채지 못했던 용기에 놀라고 말로는 채 가늠하지 못했던 깊이에 감탄하며 미처 몰랐던 속마음들을 파고들었다. 혼자 킥킥 웃다가 마음이 찡해지기도 하고, 괜히 코를 훌쩍이며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이전까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새로이 이들을 헤아리고 다시금 사랑에 빠졌다. 그들을 읽는 일이 너무 근사해서 나도 글을 쓰고 싶어졌다. 아니, 새삼스레 쓰고 싶어졌다기보다는 더 이상 미루고 싶지 않아졌다. 그러려면 마감이 필요했다. 호모 케소(Homo cesso). 나는 미루는 인간이니까. 바빠서 미루고, 피곤해서 미루고, 노느라 미루고. 마감이 없으면 써야지, 써야지 생각만 하다가 아주 영원히 미뤄버릴 것이 뻔했다. 언젠가 써야지 하고 생각해둔 것들이 벌써 열 개쯤 풍화되어 알아볼 수도 없게 된 참이었다.      


‘아, 뭐더라. 뭔가 쓰려고 했었는데….’ 게으름 피우느라 잃어버린 문장은 결코 돌아오는 법이 없다. 자력으로 쓸 수 없다면 계기를 만들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선 만나는 사람마다 올해는 꼭 글 쓰는 모임을 시작하겠다고 나불나불 이야기했다. 글을 써야겠다고, 그런데 그냥 쓰기는 어려우니 책을 매개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그리고 세 번째로 나의 결심을 말했을 때, 아마도 이미 비슷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을 친구들이 흔쾌히 동참해주었다. 할까? 그래, 하자!      


그러고 선택한 첫 번째 책이 《활활발발》인 것은 아주 운명적인 일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이야기에 멱살을 잡혀 책상 앞에 앉는 사람들. 그들의 녹초가 된 몸을 다시 일으키는 문장들. 이토록 치열하게 쓰인 글과 쓰는 일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사이의 견고한 연대.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얼마나 게으르게 써왔나, 그리고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문장을 잃었나 하는 반성과 후회가 밀려왔지만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대신 기쁨에 마음이 벅차올랐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토록 빛나는 지성과 강철 같은 마음과 끈기로 벼린 손으로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어딘가에 또 한 무더기의 글 쓰는 사람과 그들의 단단한 연대가 있을 거라는 사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교차하고 엇갈리는 언어는, 이야기는 삶을 구한다. 그건 자신의 삶일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의 삶일 수도 있다. 지금이 될 수도 있고 십 년 후가 될 수도 있고 어쩌면 백 년 후가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게으르거나 지쳤거나 바빠서 서랍 속에 박혀 있던 이야기 수만 개를 세상에 내놓을 것이다. 그 이야기들은 언젠가 누군가의 삶을 구할 가능성을 안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빛나는 구명조끼들이 세상에 뿌려질 것이다. 이 책이 쏘아 올린 작은 이야기들이 거미줄처럼 촘촘한 안전망이 되어 어느 날 누군가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런 막연한 상상을 하면서 나는 희망과 사랑을 느꼈다.   

  

나의 주요한 욕망 중 세 가지. 읽는 것, 쓰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머무는 것. 쓰기 위해서, 읽기 위해서, 그리고 머물기 위해서. 이번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핑계 삼았다. 책과 사랑하는 친구들. 이들이 있는 한 나는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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