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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Apr 04. 2020

선택의 기회

쉰들러 리스트 (Schindler's List, 1993)


지지난 주에는 <쉰들러 리스트>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10여 년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꼈다.


그걸 글로 남겨둔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쉰들러를 그저 선한 사람, 영웅적인 사람으로만 기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것들이 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선한 사람, 바른 사람, 영웅이기 이전에 선한 행동을 할 기회를 가진 사람,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 선택지를 가질 수 있었던 사람, 그리고 그에게 허락된 선택으로써 영웅으로 기억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편에는 선택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자신과 가족의 일이었음에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 그리고 거대한 슬픔, 한 덩어리의 악몽으로 뭉개져 기억되는 사람들.


잘못된 신념을 가진 독재자가 압도적인 권력을 거머쥐고 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누군가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고(1), 누군가는 앞장서 폭력을 휘둘렀으며(2), 누군가는 나름의 최선으로 저항했고(3), 그보다 더 많은 수는 방관 혹은 권력에의 기생을 선택함으로써 전쟁에 동참했다(4).


이전 관람에서는 적극적 가해자(2)와 소극적 구원자(3)의 상이한 선택을 비교했다면, 이번에는 모든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1)과 선택의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2,3,4)의 대비를 보았다.



이자크 스턴, <쉰들러 리스트>



선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힘과 권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전쟁이 심화되고 관리가 어려워지자 유대인들을 몇 개의 대형 수용소로 이감하라는 대대적인 명령이 떨어진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로 쉰들러는 더 이상 자신의 일꾼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공장을 정리한 그는 전 재산을 털어 그들을 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의 유능한 유대인 회계사 이자크 스턴과 '쉰들러 리스트'를 작성한다.


선택된 사람들은 두 개의 기차를 나누어 타고 쉰들러의 고향으로 향한다. 그러나 기차 중 하나가 서류상의 오류로 공장이 아닌 수용소로 보내진다. 쉰들러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수용소로 찾아간다. 그가 만난 감독관은 서류 작업의 번거로움을 이유로 다음 날 들어오는 300명의 유대인을 공장으로 보내줄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그는 '나의 사람'들을 요구하며 그의 제안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렇게 300명의 운명은 엇갈린다.


수용소로 오고 있던 사람들은 그들에게 또 한 번 삶의 기회가 주어졌다가 사라졌다는 걸 까맣게 모른 채 재가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삶과 죽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에 의해 선택되었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선택할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쉰들러는 패전 후 전범이 되어 공장을 떠나며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않은 것을 한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가족과 친척, 삶을 모두 잃어버리고 그의 도움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를 위로한다. 그의 후회와 눈물에서 사무치는 회한이 느껴졌다. 그는 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후회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따라 울면서 후회할 선택조차 하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을 떠올렸다.











어떤 현실을 화두로 올릴 때면 '끔찍하니까 알고 싶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누군가는 '나중'을 기약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잘 모른다'며 대화를 서둘러 끝내기도 한다.


어느 날 알게 되었다.

외면하는 것, 나중으로 미루는 것, 그리고 잘 모르는 것이 우리가 가진 권력이라는 걸.

그것이 내가 마주한 일이었다면 그걸 보지 않거나, 미루거나, 잘 모를 수는 없었을 테니까.


어떤 진실이 끔찍해서 알고 싶지 않을 때, 할 수 있는 일을 미루고 싶을 때, 그 사실을 다시금 되새긴다.


외면하고 미루는 것이 나의 선택이라는 걸,

선택을 미루는 것조차 내가 가진 힘이라는 걸,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선택하고 있다는 걸,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선택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는 걸.


자신이 가진 힘을 간과하는 사람은 쉽게 가해자의 편에 선다. 영웅적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사람만큼 선택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쉰들러 리스트>는 언제나 별 다섯 개를 꽉꽉 채우고도 모자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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