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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r 25. 2016

이상한 나라

자발적 실로(失路)


걱정이 많은 출발이었다. 무엇보다 설레지도, 기쁘지도 않은 무던한 마음이 가장 찝찝했다. 습관처럼 웃고 있었지만 정신은 수면 100m 아래 잠겨있는 기분이었다. 시간이 흘러서, 나이를 먹어서, 이미 많은 것이 바뀌어버려서 이젠 더 이상 예전 같은 기분으로 여행할 수 없는 걸까? 견디기 위해 무뎌진 마음 탓에 기쁨도 설렘도 밍밍한 감정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두려웠다.



10시를 훌쩍 넘겨 출발한 비행기는 까만 새벽이 한창 기승을 부릴 때 사이판에 닿았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졸린 눈을 비비며 입국을 기다렸다. 느릿느릿 줄어드는 줄에 불만들이 무성해진 후에야 수속이 끝났다.


사이판의 첫인상은 즐거웠다. Hello, 건네는 인사에 싱글벙글 웃어준 아저씨 덕이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얼어붙었던 마음이 부스스 흘러내렸다. 숙소로 향하는 창 밖으로 무거운 침묵흘렀다. 한밤중임에도 땀 한 방울을 삐질 흘리게 하는 온도와 습도가 여긴 사이판이야, 말해주는 듯했지만 졸린 눈에 서린 것은 잠뿐이었다.



Saipan, USA (2015)



늦은 체크인을 하고 쉴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두 시간 남짓. 커다란 침대는 여행 중 누웠던 어떤 침대보다도 깨끗하고 포근했다. 집을 떠난 것이 벌써 스무시간 전이었다. 당연히 눕자마자 곯아떨어지겠거니 했는데 웬일인지 하얀 눈밭 같은 시트에서 오랜 시간을 뒤척였다. 하루 만원짜리 숙소에 익숙해진 싸구려 몸뚱이에게 킹사이즈 침대는 영 낯선 촉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해가 뜨고 경비행장으로 가는 길은 지난밤과 사뭇 달랐다.


어둠 속에 이런 해변이 묻혀 있었던가,


눈이 휘둥그레졌다. 연녹색의 낮은 들판 위로 커다란 뭉게구름이 번졌다. 키 높은 풀들이 구름과 함께 떠밀렸고, 짙은 바다와 옅은 하늘은 거칠 것 없이 넓었다.


사이판의 하늘은 이런 색이었구나.

바다는 이런 색이었구나.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열 개의 손가락은 풍경을 더듬기 바빴다.


일정은 곧바로 로타로 가는 경비행기에 탑승하는 것이었다. 경비행기로 30-35분.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교통수단은 없다. 비행기의 기종에 따라 다르지만 탈 수 있는 인원은 파일럿을 포함 4인에서 10인까지다. 하늘을 는 이 조그만 기계는 유난히 무게에 예민하다. 항공사 측에 미리 몸무게를 알려야 했고 수화물 무게도 1인 최대 15kg으로 엄격하게 제한된다.





뜨거운 햇살을 그대로 내리쬔 경비행기는 그야말로 찜통이었다. 엔진이 가열되는 사이 승객의 이마며 목덜미땀이 배었다. 짧은 활주로를 요란하게 내달린 녀석은 이내 사뿐히 공중에 발을 딛었다. 요란스러운 프로펠러에 비해 날개는 너무도 고요했다. 바다에 얼굴을 묻으면 탈탈 탈탈탈-, 고작 한 뼘 앞의 소리가 딴 세상 것처럼 멀어진다. 시답잖은 에어컨이 가동되었지만 달아오른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비행기는 낮은 고도를 유지했다. 그 덕에 구름 사이를 통과하거나 종종 거대한 적운을 꿰뚫기도 했는데 앞 뒤 사방의 창이 하얀 구름으로 흐려지면 신비의 섬 로타로 가는 마법의 문이 열린 듯했다. 창 아래 내다보이는 짙은 파랑과 남색의 얼룩진 바다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맑고 서늘했다. 남태평양의 푸른빛에 눈이 시려 꾸벅꾸벅 졸다 깨기를 세 번쯤 반복하고 나니 초록으로 우거진 로타의 가장자리가 나타났다.


어찌 지구에 이런 곳이 남아있을까,


거만하게도 이런 생각을. 우거진 야자수와 풀잎은 뜨거운 태양에도 아랑곳없이 짙었다. 원시의 초록은 강렬했다. 풀썩 몸을 던지면 헤어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앨리스가 다녀왔다던 이상한 나라는 저 속에 있지 않을까- 하고 문득.




경비행기는 사이판에서 티니안이나 로타로 이동하기 위해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교통수단이다. 국제공항 옆에 위치한 국내선 터미널에서 ARCTIC CIRCLE AIRCO(로타)와 STAR MARIANAS AIR(로타, 티니안) 항공편을 이용할 수 있다. 로타로 가는 경비행기는 하루에 한 번 11시에 출발한다. 예약은 전화나 E-mail을 통해 할 수 있으며 3주 전에 예약을 마치는 편이 안전하다.

Starmarianasair    TEL. (670) 433-9998 , http://starmarianasair.com 
Arctic circle airco    TEL. (670) 532-1155













ROTA



로타 리조트는 섬에서 유일한 리조트 시설이다. 빌라형으로 한 건물에 4개의 객실이 들어있는데 고요하고 한적해서 자꾸만 콕 틀어박히고 다. 화려하지 않지만 따뜻하고 아늑하다. 24시간 에어컨이 켜져 있는 방은 작은 낙원이었다.



어딘가로 이동할 때는 늘 텅 빈 도로를 느릿느릿 달렸다. 좁은 도로는 막히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누구 하나 쌩- 앞서 나가지도 않는다. 암만 느긋하게 달려도 늦을 걱정이 없기 때문일까.


띄엄띄엄 도로변에 늘어선 낡고 낮은 집들은 하나같이 고요했다. 얼마나 고요한가 하면, 도대체가 인기척이 없어서 고개를 주욱 빼고 미간을 찌푸려 봐도 사람이 사는 건지 아닌지 분간해낼 재간이 없다. 이따금 작은 마당의 올드카가 윙크라도 보내오면 겨우, 저 집은 누군가 살고 있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섬의 몇 부분을 제외하고 사람을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누군가 지우개를 꺼내 들고 삶의 흔적들을 쓱싹쓱싹 지워낸 것만 같다. 하얗게 밀려나온 삶의 조각들은 바람이 일렁일렁 밀어냈을게다. 이렇게 작고 조용한 섬나라라니.


오래된 영화 속에 들어온 것 같다.








나는 무서운 게 많다. 수영을 못해서 물이 무섭고, 날개가 없어서 높은 곳도 무섭다. 그래도 패러글라이딩이나 스카이다이빙은 종종 해왔는데 망망한 바다에 빠지는 건 또 처음이다. 보트를 타고 나가는 동안은 괜찮았는데 막상 뛰어들라니 막막하기 짝이 다. 구명조끼를 있는 대로 조였다. 바다에 뛰어드는 과정은 야속하도록 간결하다.



언제고 발이 닿지 않는 것은 무서웠다. 바다 한가운데 떨어뜨려놓았으니 닿지 않는 것이 당연한데도, 오리발로 한층 무거워진 다리를 괜히 버둥댔다. 구명조끼가 가라앉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들고서야 스노쿨을 입에 물고 바다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바다를 마주한 순간 컥-하고 이마신 숨을 내쉬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다. 연이은 순간엔 소리를 내질렀다. 첫째는 믿을 수 없는 물 색에 놀란 탄성이었고, 둘째는 발아래 펼쳐진 바다가 너무 깊어서 놀란 비명이었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바닥은 30m 아래에나 있었다. 시리도록 푸르고 맑은 물은 스스럼없이 바닥을 내비쳐 보였다. 세상에, 나는 너무 놀라서 조금 어리둥절 했다.

 

놀란 가슴도 잠시, 자맥질을 몇 번 반복한 뒤엔 짐짓 익숙한 듯 물속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깊고 투명한 푸른빛은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짙고 깊은 끈적한 파랑의 물방울을 사이에 두고 빛이 투과되어 내려오는 듯했다. 이렇게 짙으면서도 투명할 수가 있나? 이건 반칙이잖아.


잡을래도 잡을 수가 없는 물길을 파아랗게 헤치면서 아마도 꿈속을 유영했다. 물고기는 드문드문 눈 앞을 지날 뿐이었지만 그 바다로도 충분했다. 아니, 차고 넘쳤다.

 

하고 많은 '블루' 중에서도 감히 어울리는 색을 찾지 못해 '로타 블루'라는 또 하나의 색이 된 바다.

그 바다에 뛰어들었다니, 그 바다를 헤엄쳤다니. 내 생에 첫 스노쿨링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로타를 다 둘러보려면 하루면 족하다. 그러나 로타를 알아보려면 한 달도 모자라다. 이 작은 섬에 푹 빠진 일행들이 남겨둔 아쉬움을 긁어 모아 가방에 담았더라면 경비행기는 뜨지 못했을 거다.


로타, 로타의 바다, 로타의 사람들, 로타의 야자수, 결국엔 로타의 모든 것.


돌아오는 비행기에선 누구도 말이 없었다. 아무리 보아도 모자란 로타를 마음에 새기느라 바빴기 때문일 거다.













SAIPAN



여태 나의 여행이란 게으름의 다른 말이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으나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하루가 대부분이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곳들을 우연찮게 발견하여 구경하거나, 드물게 일행들 손에 끌려 어딘가를 방문하기도 했지만 호스텔 구석에 앉아 누군가와 시시덕 거리거나 주변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날들이 더 많았다.


그런 내게 온전히 주어진 밴을 타고 하루 온종일 사이판의 온갖 명소들을 두루 돌아보는 일정이라니. 새롭고도 흥미로운 세상이었다. 그리고 나의 비루한 체력을 절실히 체감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제 와서 변명 밖에는 안되지만 느린 내겐 무엇을 보고, 담을 시간이 부족했다. 더 알고 싶은 순간들을 등 뒤에 두고 돌아 서야 했다. 아쉬움은 미련이 되어 끈질기게 나를 좀먹었다.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는 부담감은 어마어마했고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더 거대한 짐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나는 턱없이 부족했고 하루의 끝에서 자꾸만 작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투어는 끝났다. 몸은 금방이라도 흐늘흐늘 늘어질 것 같았지만 다시 만세절벽으로 향했다. 목적은 단 하나. 별을 보기 위해서였다. 만세절벽은 도심과 떨어져 있어 별을 보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다. 과연, 차에서 내려서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과 모래알 같은 별들이 나를 반겼다. 어찌나 많은가 하면 맨 눈으로 은하수가 보이더라니까, 세상에. 


늦은 시간임에도 절벽에는 별을 찾아온 이들이 많았다. 수많은 별에 마음이 동했는지 하나같이 달뜬 사람들은 노래를 하고, 소곤소곤 사랑을 속삭이기도 했다. 공기를 타고 전염되는 설렘은 시간이 갈수록 진했다. 어찌할 새도 없이 하늘에 푹 빠졌다. 별 밤의 신비란 종잡을 수가 없다. 당연한 듯 주위의 소란들이 서서히 잦아들었고 나는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 거친 바람이 불어와 난간에 바짝 다가선 몸을 밀쳤다. 낮시간 하얀 거품을 내던 파도는 간데없고 드센 바람만 넘실댔다. 가는 머리카락이 방향 없이 제멋대로 휘날렸다.



닿는 것이라면 무어라도 집어삼킬 듯 달려드는 무시무시한 파도 때문에 한 번 뛰어들면 절대로 살아나올 수 없다는 절벽. 하여 전쟁이 패배로 끝났을 때 수많은 일본인이 '천왕 폐하 만세'를 외치며 뛰어들었다는 바다. 낮에 마주했던 파도는 너무도 위협적이어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인들 저 바다에 어찌 뛰어들 수 있단 말인가' 의아했었다. 그러나, 그 별빛이 사이렌의 노래라도 되었던 걸까. 뵈는 게 없는 밤이 되고 보니 이쯤이면 바람에 밀린 척 달려들어 바다의 품에 안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 종종 머리를 스치는 동안 하늘엔 별이 많아졌다. 밤을 올려보느라 쳐든 고개가 뻐근해왔다. 바람이 목덜미를 주무르는 나를 자꾸 밀쳤다. 휘청휘청 흔들리면서 '이대로 떨어진다면-' 상상했다. 풍덩, 몸과 바다가 부딪히는 소리마저도 거센 파도에 묻힐 것이 분명했다.


섬처럼 떨어져 턱을 괴었다. 가득한 별보다도 거세게 어루만지는 바람이 더 좋았다. 눈을 감았다. 별빛 대신 바람이 전해져 왔다. 바람의 결을 세어다 올라타면 훅-날아올라 별에 닿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MANAGAHA ISLAND



사이판에서 멀지 않은 않은 곳엔 마나가하라는 섬이 있다. 섬에는 식당과 화장실 밖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1인 5달러인 입장료가 1년이면 50억 달러를 넘는다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작은 섬을 찾는지 쉬이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내 생에 두 번째 스노쿨링을 했다. 마나가하 해변엔 열대어가 많았지만 거친 산호 또한 많았다. 물 속은 지루하지 않았지만 물고기를 보는 일엔 금세 싫증이 났다. 곧 물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담그고 이따금 오리발을 저으면 어디로든 떠 갈 수 있다. 눈을 감아도 좋다. 우웅- 하고 안으로부터 울려오는 소리는 순식간에 세계로부터 나를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다. 실상은 벅적대는 사람들과 고작 1미터를 멀어진 것뿐이었어도 기분만큼은 심해였다. 혹은 우주이거나.


온몸에 힘을 빼고 낙엽처럼 세계를 떠도는 일은 마음이 편했다. 나를 감싸는 그런 울림이 물속엔 있었다.


 
 



                                                                                                  







좁은 식견으로 가보지도 않은 휴양지에 대해 편견 아닌 편견이 있었다. 마리아나는 옹졸한 편견을 깡그리 부술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곳이다.


넘실대던 태평양이 어찌나 아름다웠는지, 4박 6일을 내도록 헤어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마리아나에서의 기억은 손에 담길 듯 담기지 않는 푸른 바다처럼, 열 손가락 사이로 자꾸만 흘러내린다. 무엇에 홀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바다에 고개를 파묻던 순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숨이 턱 막혀오는 걸 보니 그 푸른 바다에 단단히 물이 든 것 같다. 파랗게- 파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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