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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잉지 May 14. 2016

서울 나들이

feat. 시골 라이프 커밍아웃


나는 아주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


시골이라면 얼마만큼-, 이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을 위해 조금 덧붙이자면 매년 초가지붕을 새로 이어야 되는 정도는 아니었고 본가 옆에는 불을 땔 수 있는 온돌방이 따로 있고 뒷마당에는 안 쓰는 우물이 남아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돌아오는 계절을 여러 번 맞았다. 이러저러 꽃이 피는 봄이 되면 쑥이나 산딸기 같은 걸 따러갔다. 봉선화가 피면 잎을 콩콩 찌어다 손톱을 물들였고, 아주 가끔은 친구들과 함께 개울에서 가재나 작은 새우 같은 걸 잡기도 했다. 여름이 오면 낮에는 매미가 밤이면 개구리가 경쟁이라도 하듯 울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엔 논이 하나 있었는데 타박타박 길을 따라 걷다가 익지 않은 초록의 벼를 씹고 뱉어내길 반복다. 여물지 못한 씁쓸함이 좋았던 가보다, 고 생각지만 사실 왜 그랬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다 가을이면 콩이 단으로 묶여 골목을 따라 늘어섰는데, 그땐 또 길에 떨어진 노랗고 딱딱한 콩을 주워 모으며 집에 가는 일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사 계절 내내 집 앞마당엔 상추나 고추, 양파나 배추 같은 것들이 자랐고 뒷마당엔 키 큰 옥수수 따위가 잠깐 새 엄청나게 컸다가 어느 순간 베여 사라지곤 했다. 마당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은 번갈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어느 해에는 앵두나 자두가 달았고, 어느 해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렸다. 컴퓨터나 게임기도 있었지만 그 마당에서 줄넘기를 하고 자전거를 타고 고무줄놀이 같은 걸 하며 놀았다. 벚꽃 같은 건 없었지만 지루할 새 없는 풍경이었다.


슬기로운 생활인가 즐거운 생활인가. 개구리 알을 가져오세요, 하는 숙제가 도시에서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 식물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올리고 열매를 맺는 일을 본 적 없는 아이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


사람은 본 대로 알고 그런 채로 사는 법이다.






그런 내게 서울의 이미지는 ‘빌딩 숲’이었다. 거대한 도시는 네모반듯하고 재미가 없었다. 바쁘고 삭막하고 붐비고 피곤했다. ‘서울깍쟁이’들이 ‘코를 베어’ 갈 것 같은, 숨 막히는 같은 형용사로 수식되는 막연한 편견은 나이를 먹고 서울을 종종 드나들며 오히려 더 깊어졌다. 매번 지하철엔 사람이 미어터졌고,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바쁜지 주위를 둘러볼 새도 없이 뛰듯 걸어 다녔다. 10차선 도로를 에워싼 높은 빌딩은 밤이 깊어도 어두워질 줄을 몰랐다. 그런 걸 볼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서울엔 못 살겠어.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 피곤한 도시. 그것이 내 인생 전반에 걸친 서울의 이미지였다.



그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 겨우 작년이다. 도통 갈 일이 없던 서울에 발길을 하게 된 것은 이런저런 연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전엔 늘 혼자여서 전시나 공연 같은 걸 보고 나면 어디를 구경하거나 하는 일 없이 잽싸게 내려가곤 했는데 최근엔 서울에 사는 좋은 사람을 여럿 알게 되어 여기저기를 많이 다녔다. 그러는 동안 구석구석 숨겨진 도시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손 닿으면 베일 것 같던 서슬 퍼런 도시의 골목 사람 사는 냄새가 짙었다. 그것도 모르고 서울이라면 고개부터 저었던 내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이번에는 무턱대고 외면해왔던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는 모습들을 담아왔다. 친구로부터 ‘서울 안 저래-’라는 평가를 들었지만 아무렴 어때. 이 것이 내가 사랑하기 시작한 서울의 모습.


장소는 바뀌어도 취향은 변하지 않는다.



Seoul, Korea (2016)


01.


5시에 종로, 가 약속이었으나 4시에 도착했다. 무얼 할까- 하다가 종묘를 둘러보려고 했는데 관람시간이 정해져 있고 중간에는 빠져나올 수 없단다. 다녀오면 약속시간에 늦을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다. 대신 담 옆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걸었다.


담벼락 맞은편에는 아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듯한 낡은 가게들이 많았다. 무엇을 먹기에 참 어정쩡한 시간인데 간이 테이블에는 할아버지 둘이 마주 앉아 후루룩 국수를 삼키고 있었다. 봄볕에 그을린 할아버지의 옆모습이 왠지 알싸했다. 따뜻하고 사랑스러운데도 그랬다. 굽은 어깨 때문이었는지도, 눌러쓴 모자 아래 깊은 주름 때문인지도, 불쑥불쑥 터져나오던 한숨 같은 기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봄볕 아래 초록이 영롱했다. 손 그늘을 만들어도 눈이 부셨다. 그 골목에선 ‘생활’의 냄새가 났다. 모두가 뭔가에 열심이었다. 요즘은 길 담배를 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그 골목엔 가득했다. 저마다 아랑곳 않고 누구도 개의치 않는 낌새다. 어느 작은 골목 <사진 도매상가> 간판 뒤에서는 웅장한 목소리를 가진 아저씨가 오래된 가곡을 불렀다. 좁은 골목을 힘차게 울리는 목소리에 우뚝 멈춰서 담벼락을 한참이나 기대고 서 있었다.



Seoul, Korea (2016)


02.


익선동에 갔다. 낡은 옛 건물을 그대로 두고 인테리어를 새로 한 가게들이 그득했다. 무너진 담벼락이 그대로라니, 좋은 곳이다. 부수지 않고 함께라니 정답다.


종로와 낙원 상가를 지나 인사동, 그리고 청계천. 청계천엔 어느새 나무가 많이 자라서 저대로 새로운 생태계를 하나 만들었더라. 예상을 하고 만들었는지 어쩐지는 몰라도 처음보다는 보기가 좋다. 레퍼토리가 확실한 연주자 하나가 연습인지 공연인지 모를 것을 시작했다. 바람과 음악과 맥주가 달다.



Seoul, Korea (2016)


03.


한강 근처는 탁 트여 시야가 시원하다. 그 덕에 잔디밭에 앉은 채 오랫동안 하늘을 들여다보았다. 여행 중엔 의식하지 않아도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는데 한국에선 그러질 못한다. 시야가 짧아서일까. 어쨌든 자주 보며 살아야지 해놓고선 매번 잊게 되는 그 하늘에 대한 얘기를 건넸었는데 헤어지는 길에 S가 '오늘 하루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해요.' 하고 인사해왔다. 쑥스럽다.


하늘, 참 가깝고도 멀다.      



Seoul, Korea (2016)



04.

 

잔디밭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사람들 틈에는 좋은 기운이 가득했다. 금요일 저녁, 일상에서 해방된 조금 붕 뜬 얼굴들. 이런 기운은 언제라도 좋다. 4열 종대로 줄을 선 별 같은 가로등이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위를 밝혔다.


한걸음 떨어져 바라보는 도시는 아름답다.      



05.


겹겹이 조명을 밝힌 건물의 모서리를 한참 더듬어 닿은 하늘 끝에 별이 하나. 구름이 가득해 달도 없는 하늘에 저렇게 밝은 별이라니, ‘별이 아니라 인공위성인가 봐요.’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S가 말했다. 저게 오늘 밤 단 하나뿐인 별인가 보다고.


아, 과연 별이다.




06.


낙산 공원에 갔다. 마을버스가 구불구불 오르막을 올랐다. 바람이 거세었다. 봄 닮은 초록이 흐드러지게 휘었다. 아카시아가 만개했다. 낮은 가지를 코 끝까지 끌어당겨 향기를 맡았다.


봄 내음이 진동한다.      




07.


언제나 그리하듯 발 닿는 대로 길 난대로 걸었다. 그랬더니 대학로와 마로니에 공원이 나왔다. 홍대 아트센터에서는 김광석 공연이 한창이었다. 광장시장과 평화시장과 방산시장을 지나 동대 입구에 닿았다. 현대 문학관 현판이 보이기에 잠시 방문하기도 했다. 그만큼을 걸어갔다니 사람들이 입을 떡 벌렸다.


아는걸 힘이라고도 하고 모르는걸 약이라고도 하지만

어쨌든 무식하면 용감하다.



08.


돌담길 앞에서 여름을 닮은 색소폰 연주를 들었다. J는 가로수 나무 아래 핀 색색깔 꽃을 하나씩 꺾어다 주머니에 꽂고, 입에 물고, 하나는 귀에 꽂아주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럽다.




09.

 

사람들을 만나는 내내 신이 나서 기억 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많 늘어놓았다. 언젠가 다시 만나 그때 그랬더라고, 들려준다면 분명 얼굴이 붉어질 거다.



10.


언젠가부터 ‘내일 죽는다면?’하는 질문에 여느 날 보다도 평범한 하루를 살고 싶다고 답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사는 일이 시들해졌다거나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기 보다도 다를 것 없는 소소한 일상이 소중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함께여서 꼭 붙잡고 싶은 순간들. 꼭 좋은 것을 보거나 먹지 않아도, 대단한 일을 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의미 있고 소중하다. 그런 하루하루이므로 사라질 내일에 대한 두려움도 오늘에 대한 후회도 사실은 없다.      



11.


함께 한 시간들로 재미없던 풍경이 색깔을 되찾았다. 역시 사는 기쁨은 좋아하는 사람들을 곁에 두는 것. 함께 마음을 나누고 시간을 보내는 것. 무엇하나 이룬 건 없지만 이런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느낀다. 사실은 나도 ‘잘’ 살고 있다고.      





함께여서 그리운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다시 그리운 순간 하나를 만들었다.     


매번 이 모든 인연에 놀랍고도 감사하다.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먹고 싶은 것은 없는지, 또 못 먹거나 싫어하는 것은 없는지 다정하게 물어는 따뜻한 마음들이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대부분 사람에게 말수가 적다. 게다가 조리 있지도 않고, 재미있지도 않고, 적극적이지도 못하다. 말의 첫머리를 시작해놓고 방향을 잃는 일도 자주다. 그런 나에게 귀 기울이고, 사랑해주는 당신. 무심한 나를 먼저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어 고맙고, 또 고맙다. 내게 와줘서, 손 내밀어 줘서, 이토록 많은 순간을 함께 해줘서,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있는 그대로 보듬어 줘서, 그대의 새로운 모습을 알려주고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줘서.


몇 번이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기쁨이 흘러넘치는 바람에 감정과잉이 상당한 채로 휘갈겨 썼다.


스스로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 기록의 본질일까, 에라 모르겠다.


어쨌든 이 세에 내가 머물고 싶은 곳이라면, 소중한 당신들 곁이다. 이런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새벽 두시쯤, 수줍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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