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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트 Feb 27. 2024

직장인에게 명상이란?

직장인에게 명상이 필요한 이유

직장인이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다. 직장이란 내가 스스로 세운 회사가 아니라, 남의 회사를 다니는 구성원을 뜻한다. 남의 회사의 목표란 내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너가 정한다. 연 매출액 달성 지표, 개인별 달성해야 할 과제를 KPI라는 지표로 계획을 수립하고 달성률을 확인하고 평가받는다. 그런 직장인들에게 '휴식'이란 적어도 직장생활, 직장 내 근무시간에는 주어지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성과를 보여야 하고, 증명해야 한다. 남들 미친 듯이 뛰고 날고 있을 때, 나혼자 여유롭게 앉아 명상할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직장인들에게 명상이란 '사치', '불가능'에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명상이 대중화 되어가는 이유

위에 언급한 직장의 '역설' 덕분에, 결국 직장인들이 명상을 찾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퇴근한 이후 또는 주말 시간, 아니 더 가까이는 출퇴근 시간과 점심시간 등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자신만의 명상법을 즐기기도 한다. 누군가는 음악을 듣고, 또 누군가는 게임을 하고, 또 누군가는 잠을 청하기도 한다. 참 신기하게도, 저 행위들 바로 뒤에 '명상' 이라는 칭호만 붙이면 아주 멋진 '명상법'이 된다. '음악 테라피 명상', '게임 놀이 명상', '잠(수면) 명상' 처럼 말이다. 명상이라는 게 뭔가 거창한 것 같지만, 사실 직장인 모두는 각자의 방법, 각자의 시간과 공간을 활용해 이미 명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명상'이라고 인지하고 있지 못했을 뿐.


명상에 대한 모두의 착각

앉아서 하는 것만이 명상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좌선', 앉아서 하는 수행법을 일컫는데, 이는 수많은 명상법 중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진 방편에 불과하다. 진정한 명상의 본뜻은 이것이다. 특히 명(冥, 어두울 명), 상(想, 생각할 상)의 한자 어원에 충실한, '눈을 감고 생각하는 행위'에 가장 가까운 것이 앉아서 하는 좌선 명상이기에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명상은 조금 다르고, 실제 명상 전문가(?)들, 업자들이 말하는 명상의 방법론도 이보다 훨씬 다양하고 그 폭이 넓다. 실제 업계에서는 모든 것들을 명상과 붙여 말한다. <요가 명상>, <싱잉볼 명상>, <호흡 명상>, <움직임 명상> 등등... 뭐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결국 본질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도대체, 명상이란 무엇인가?



전문가들, 스님들이 말하는 명상 말고, 내가 생각하는 명상이란

나는 산속에서 30년 수련한 고승도 아니고, 그렇다고 명상에 관한 책을 수백수천권 읽은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자부할 수 있는 건, 그 누구보다 나 자신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나를 둘러싼 세상과 자연에 대해 많은 고민과 물음을 해 왔다. 그 모든 노력의 과정과 시간들이 내 인생의 '명상 수련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나에게 명상이란 다음과 같다.


명상은, 나와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다

명상하는 동안 나는 누구의 지시도 방해도 받지 않는다. 

설령 누가 물어도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명상 선생님도 나에게 동작에 대한 알림만 줄 뿐, 내 입을 열어 내 생각을 말하도록 유도하지 않는다. 입과 생각은 닫고, 오로지 흘러가는 대로 몸과 생각의 흐름을 들어보라고 말할 뿐이다. 


명상은 오직 내가 나에게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너 오늘 어때?', '기분은 괜찮아?', '몸 컨디션은 어때?', '어제 있었던 그 일은 좀 괜찮아졌어?', '앞으론 어떻게 살고 싶어?', '무엇이 너를 힘들게 해?' 나 OOO이, 바로 나 OOO에게 묻는다. 내가 너가 되는 시간, 유일하게 객관적으로 나 자신에게 물어보는 시간, 나 자신이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가 되는 시간, 나 자신이 오늘 처음 만난 완전히 새로운 제3의 인물이 되는 시간. 가장 가깝고도 먼 나를 만나고 대화하고 알아가는 시간이다.


답을 구하지 않는다

명상의 가장 좋은 점은, 답을 찾지 않는다는 점이다. <묻는 행위>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늘 상대방,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관심이 많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 물어본 적이 있던가? 상대방, 주변과 나 자신을 수없이 비교했지만, 단 한번도 비교 없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준 적이 있던가? 없었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은 나와 타인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시 속에서 말하는 제3자 '그'는 바로 너, 친구,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 이었음을...


다시 한번 그 시를 들여다 본다. 단, <그(he/she)>라고 표현된 모든 부분들을 <나>로 바꿔본다.


<꽃> - 김춘수 -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나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나에게로 가서 나도

나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나에게, 나는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끝/




모든 직장인들이여, 

부디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시간을 단 1분만이라도 갖기를


다른 누군가의 꽃이 되지 말고,

스스로 내 인생의 꽃이 되어주기를


나에게 잊혀지지 말고, 

내가 사라지지 않는 인생이기를


명상은, 곧 살아있는 나를 만나기 위한

모든 현대인들의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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