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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인과 하나님

2023년 04월 17일

by 천우주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하나 있다.

...... 아니 마음에 걸리는 일은 너무 많으니 문장을 고쳐 써야겠다.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일들 중 하나가 있다.'







1.

3주전쯤 횡단보도 근처에서 특이한 행색의 두 사람을 보았다.

한 명은 키가 작고 통통했으며, 다른 한 명은 제법 큰 키에 살집이 굉장하였는데 어딘지 모르게 형제 같아 보였다.

나이는 사십 대 정도.

아니 그러한 이들이 나이보다 더 들어 보이는 경우도 많으니 어쩌면 삼십 대.

둘의 옷차림은 꽤 달랐으나 낡고 지저분하다는 것과 마치 시대를 통틀어 유행의 가장 언저리에 있는 패션들을 제각각 모아 그것들을 다시 한데 합쳐 만든 것 같은 옷차림이란 점은 비슷했다.

옷도 특이했지만 그들의 말투도 예사롭진 않았다.

빠르고 톤이 높은 음색은 지나다 돌아볼 만큼 날카로웠으며 발음은 부정확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횡단보도까지 걸어오는 동안 그들은 그 날카롭고 부정확한 소리로 쉴 새 없이 무언가에 대해 계속해 서로 대화하고 있었다.

동생으로 보이는 덩치 큰 남자는 무언가가 신기한 듯 감탄스런 어투로 계속 얘기하고 형으로 보이는 남자는 동생의 얘기에 계속 답을 하며 말끝마다 욕을 붙이며 연신 침을 뱉었다.

그들 바로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있던 나는 그들의 빠른 말과 부정확한 발음을 거의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욕만큼은 또렷하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들에게선 불안과 초조가 흘러나왔고 어떤 면은 한껏 악에 받쳐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평균적 범주의 사람들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이 그들에게 친절하진 않았을 것이다.

평균적 범주를 벗어난 그들에게 세상은 일면 잔인했을 거라 짐작한다.

내가 그렇게 짐작한 이유는 그들에게서 흘러나오는 불안과 초조 때문이었으며 나도 한때 내가 알았던 그러한 사람들에게 친절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횡단보도에서 마주쳐 2~30미터 정도를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며 느꼈던 그들의 불안과 초조는 그들의 선천적 기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환경이 만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평균적 범주를 벗어난 사람에게 주어지는 환경은 평균적 범주를 벗어난 환경이니까.

내가 보는 세상과 그들이 보는 세상은 분명 다를 것이다.

나를 대하는 사람과 그들을 대하는 사람도 분명 달랐을 것이다.

그것이 같은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2.

2주전쯤 출장을 갔다 잡은 숙소는 시내에 위치해 있었다.

오후 8시쯤 되었을까?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볼 겸 나갔다 술집이 많은 어느 길에서 몇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보니 네댓 명의 이십 대 청년들이 길가에 쓰러진 한 남성을 깨우려 하고 있었다.

다가가보니 쓰러진 사람은 술에 취해 잠들어 있는 중년으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퇴근 후 한 잔이 과했는지 남성은 말쑥한 옷차림 그대로 구두까지 신은채 쓰러져 자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날씨도 따뜻해 행여 잠을 자다 불상사를 당하긴 희박해 보였지만 청년들은 계속해서 남자를 깨우려 애썼다.


어떤 것이 따뜻한 봄날 흥에 겨워 요란스런 술집가 거리의 이른 밤에 남자를 술에 취해 쓰러지게 했을까?

어떤 것이 20대 남녀 청년들의 마음을 불안케해 그 남자를 깨울 생각을 하게 만들었을까?

앞서 말했듯 이른 시간이었고 따뜻한 날이었고 쓰러져 잠든 곳이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인도 한 켠이라 내가 먼저 그 사람을 발견했더라면 '하이고 술을 일찍 많이 드셨나 보네' 생각하고 그냥 지나쳤을 텐데 그 청년들은 어떤 생각으로 그 남성을 깨우려 했을까?



3.

일주일 전쯤 아파트 편의점에 뭘 좀 사러 나갔다 흰색 바탕의 세로 줄무늬 파자마가 눈에 들어왔다.

쉽게 보기 힘든 스타일의 그 바지는 계절에 비해 얇았으며 통이 넓은 파자마 아래로 드러난 다리는 검고 앙상했다.

쉽사리 보기 힘든 스타일의 통 넓은 파자마, 그 아래 드러난 앙상한 다리, 그리고 낡은 슬리퍼를 신은 마찬가지로 앙상한 검은 맨발은 내게 노숙인을 연상시켰지만 아파트 안의 편의점에 노숙인이 있을 리는 없을 터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든 말든 앙상한 다리의 주인공은 편의점 앞 간이 테이블에 그 가는 다리를 편히 꼬고 앉아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다리 쪽만 보았을 땐 계절에 비해 옷이 초라해 춥지 않을까 여겨졌지만 상의는 경량 패딩을 걸치고 있어 다행히 그리 추울 것 같진 않았다.

엎드려 있는 희끗희끗한 짧은 머리의 뒷모습을 보아 어느 정도 연세가 있는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엔 소주와 맥주가 각각 한 병씩 빈 병으로 있었고 그 옆엔 안주로 보이는 작은 과자봉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의 일반적 주량이라면 과음으로 잠들 만큼의 양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디서 거하게 먼저 마시고 2차로 편의점에서 입가심 한 잔을 한 건지 아니면 주량이 원래 적어서 그런 건지 소주와 맥주를 각각 한 병씩 비운 그 남자는 한 손을 이마에 댄 채 엎드려 미동도 하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고 날씨는 따뜻하였으며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아파트 편의점 앞이라 불의의 사고는 없을 것 같아 보였다.






일련의 일들을 경험하며 나는 한 가지 기억이 났다.

십 년은 더 된 일일 것이다.

그 무렵 유독 눈에 보이는 걸인이 하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걸인은 내가 가는 곳마다 문득문득 나타났다.

시내에서도, 시장에서도, 동네에서도, 아파트 단지 근처에서도 잊을만하면 모습을 드러내고 잊을만하면 모습을 드러내고 하였다.

사는 곳이 일정하진 않았겠지만 내가 그를 본 곳들이 서로 한참 떨어져 있었음에도 무슨 수를 썼는지 그는 여기서 잠깐 저기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의 옷차림은 여름이든 겨울이든 늘 똑같았다.

때에 절고 절은 두껍지도 얇지도 않은 야상 점퍼와 주머니 많은 두터운 바지를 항상 입고 있었다.

아니, 때에 절어 색상도 종류도 구분하기 힘든 옷들이었으니 설사 옷차림이 바뀌었다고 해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항상 지저분하고 추레한 옷차림으로 지치고 말라버린 몸들을 최대한 감추고 다녔다.

머리엔 옷과 마찬가지로 때가 가득한 더러운 비니 모자 같은 걸 쓰고 있었지만 그 모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였다.

그리고 항상 공허한 눈빛을 한채 약간은 구부정한 자세로 서있거나 천천히 걷고 있었다.

전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 공허한 눈빛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아무것도 보지 않았을 수도.

그 눈으로 무얼 보는지는 몰랐지만 적어도 그가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본 적은 없다.

언젠가 몇 천원 정도를 두어 번 주어본적은 있는 것 같지만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당시 아내는 그를 볼 때마다 '하나님'이라고 불렀다.

왜 그렇게 부르냐고 묻자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기도 하고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기에 그렇다고도 했다.

그리고 가장 낮은 곳에 계시기에 그렇다고도 했다.

그 후로 그 걸인을 볼 때마다 그 공허한 눈빛과 추레한 모습 속에 꽁꽁 숨어있는 위대함을 슬쩍슬쩍 찾아봤지만 내 눈으론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그래도 그 걸인을 볼 땐 '아 하나님이구나'라고 생각했고 집에 가서도 오늘 '하나님' 봤다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진짜 하나님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일종의 별명처럼 불렀던 것이다.


우리가 어떤 종교를 믿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랬듯 어릴 적 교회도 가고 성당도 가고 했었지만 중고등학교 이후로는 이렇다 할 종교 활동을 한 적도, 종교 생활을 한 적도 없었다.

그렇다고 신이 없다고 생각지도 않았다.

당시의 우리는 종교는 없지만 신의 존재는 어느 정도 인정을 하는 그런 정도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우리가 말했던 하나님이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니었다.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신'의 존재를 '하나님'이란 보편적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그렇게 우리의 초라한 '하나님'은 무슨 계시라도 주시려는 듯 몇 년간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했고 그 주기가 좀 길어지면 혹시 잘못되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아주 잠시 들기도 했다.

물론 그 걱정은 빛의 속도보다 빠르게 일상에 떠밀려 사라졌다.

그렇게 그는 나타남과 사라짐을 몇 년간 반복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의 모습은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 갔다.


걸인 하나님이 사라지고 2년 내지 3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던 것 같다.

어디였는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느 이른 봄 점심 무렵 어느 시장에서 그를 다시 보았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그는 갑자기 그렇게 나타났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그는 달라져 있었다.

구부정하기는 했지만 언제나 서있거나 걷는 모습으로 마주쳤던 그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시장 한 켠에 누워 웅크리고 있었다.

두 손으론 배를 감싸 쥐고 있었고 머리는 가슴으로 파묻으려는 듯 깊게 숙이고 다리를 한껏 모아 오므린 채 웅크려 누워 신음하고 있었다.

추레하고 지저분한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다른 세상을 바라보던 공허한 눈빛은 고통에 의해 강제로 이 세계에 돌아와 있었다.

검고 말라빠진 입술 사이로는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른 봄날이었고 모처럼 날씨가 좋았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이 제법 붐볐고 저마다 봄날의 기분 좋음을 한껏 느끼고 있는 듯 표정이 밝았다.

그렇지만 사람들 누구도 아파 괴로워하는 걸인 하나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행여 잠시 머물렀던 눈길은 다른 이에게 바통을 넘긴 듯 이내 사라져 버렸다.

눈길이 잠시 머물렀을 땐 밝은 표정이 잠시 놀라며 굳었었지만 익명의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긴 뒤 그들의 표정은 다시금 밝아졌고 가던 길을 계속 갔다.


그,

걸인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의 '풍경'이었다.

나무와 같았으며 풀과 같았다.

아니 벽과 같았고 돌멩이와 같았고 떨어진 나뭇가지와도 같았다.

아니 있으면서도 있지 않았다.

분명 존재하였고 아파하였고 괴로워하였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걸인 하나님의 공허한 눈빛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현실로 인정하지 않았다.

사람이 철저히 풍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돌이켜보면 늘 그랬었던 것 같다.

그가 멀쩡했을 때에도 사람들 대부분은 그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그의 눈이 다른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던 건 그의 탓도 분명히 있겠지만 우리의 탓도 그 분명함만큼 분명히 있었다.

이른 봄날의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계속해 넘겨지는 바통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바통은 뒤로 뒤로 던져만 지고 걸인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계로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갔다.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햇볕이 비추던 이른 봄날의 점심 무렵 사람들이 많이 다녔던 어느 시장에서 사람들은 그렇게 지나가고 지나가고 지나갔다.


나?

나도 봄날의 기쁨을 즐기는 사람 중 하나였고 햇볕 사이를 기분 좋게 걸으며 시장을 둘러보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도 어느새 내 손에 들려진 바통을 보이지 않는 등 뒤의 누군가에게 휙 던져버린 사람 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하고 싶었지만 무언가도 하지 않았다.

풍경이 되고 다른 세계의 존재가 되어버린 그에게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어디가 아프냐고 묻지도 않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았다.

경찰에라도 신고해 볼까 119라도 불러볼까 하고 생각은 했었지만 하지 않았다.

생각만으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두렵기도 했고 귀찮기도 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그렇게 해줄 거라 애써 생각했다.

설마 이 밝은 대낮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이곳에서 어느 누구라도 그를 가만히 두겠냐는 생각을 했다.

어느 누구도 그러지 않는다는 걸 이미 보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나도 그를 풍경으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외면하며 내 갈길을 갔다.


그날 저녁, 나는 그 시장을 다시 찾았다.

궁금했지만 궁금하단 걸 애써 부정하며 그곳을 찾았다.

내가 그걸 궁금해버리면 내가 외면한 것이 진실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곳에 그는 없었다.

그가 배를 잡고 웅크려 아파하던 곳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했다.

어떤 이가 드디어 바통을 받아 그를 도왔는지 아니면 신고가 들어가 경찰이나 구급대원이 그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는지 아니면 아파하다 잘못되어 불상사를 당했는지 모르지만 그가 그곳에 없다는 것에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그가 괜찮아졌을 거란 이유 없는 안심도 되었다.

'그래 누군가가 신고라도 했겠지, 그래서 그를 어디 병원이나 다른 곳으로 데려갔겠지'

그렇게 나의 외면은 스스로 정당함을 얻었다.


그 뒤로 걸인 하나님을 마주친 적은 없다.

그때 이후로 십 년은 족히 지났지만 그는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는지 정말로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알고 있다.

모르지만 알고 있다.

마술처럼 나타났던 그이기에 마찬가지로 마술처럼 사라진 그가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안다.


내가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 일들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그를 도와주지 못하고 그를 일으켜 세워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이라도 하지 않았던 게 걸린다.

당장 아프다고 하는 그에게 괜찮냐고 물어보는 작은 관심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게 걸린다.

묻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그가 아프지 않았을 때라도 한 번도 그에게 웃음 한 번 지어본 적이 없었다는 게 걸린다.

가벼운 목례 한 번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정도도 하지 못한 게 걸린다.


그 날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을 비난하는건 결코 아니다.

나는 누구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들 모두 각자의 하나님을 돌보고 있었을테니.

굳이 비난을 하자면 그건 나 스스로 일 것이다.


우리가 모두를 돌볼 수는 없다.

모든 병들고 약한 이들을 껴안을 수는 없다.

사람은 선하기도 하지만 악하기도 한 존재이다.

내민 손을 향해 칼이 돌아오기도 한다.

손을 내민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면 더욱 그렇다.

누군가 모르는 사람을 책임진다는 건 고귀한 행위이지만 또한 위험한 행위이다.

자신을 내어주어 상대를 보듬는 건 아름다운 일이지만 상대에게서 안전할 수 있을 때에만 허용해야 할 일이다.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를 책임져야 하는 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를 가장 먼저 지키고 돌볼 권리와 의무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나를 지키는 선에서 최소한의 행동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날 나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마태복음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주께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를 떠나 지옥으로 들어가거라, 내가 주릴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가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 옷 입히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에 그들이

"저희가 언제 그리하였나이까"

되물으니 주께서 대답해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걸인 하나님이 왜 하나님이었는지 아직도 나는 모른다.

그가 무얼 얘기하려 내 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풍경이 될 수도 있다는 것?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만 다른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

어쩌면 아무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알 수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몰라도 아는 게 하나 있다.

어찌 되었건 그는 하나님이었던 게 맞다.

지금도 종교가 있진 않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이었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가 하나님이 맞았다는 건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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