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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

2023년 06월 30일

by 천우주

장마가 시작되었고 날씨는 조금씩 더워지고 있다.

드디어 여름님의 본격적인 행차가 시작된 거다.

며칠간 내린 비로 습도가 높아져 최근엔 더위가 더 강하게 느껴지고 땀도 쉬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아직은 아침저녁으론 선선한지라 선풍기만으로도 제법 시원하게 지낼 수 있다.

이것도 여름님이 열대야 기술을 시전 하시면 결국 에어컨으로 방어를 해야겠지만 아직은 선풍기만으로도 여름님이 방 안까지 들어오시는 걸 막을 수 있다.


여름날엔 선풍기만 한 게 또 없다.

아이스크림도 좋고 팥빙수도 좋고 시원한 옷도 좋지만 방안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한가롭게 누워 즐기는 시원함은 그런 것에 비할바가 아니다.

물론 시원한 그늘밑에서 돗자리를 펴고 누워 선선한 바람을 쐬는 것보단 못하겠지만 집안에서 이런 시원한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건 역시 선풍기가 최고다.

요즘은 소음이 적은 선풍기들도 많이 나오는 모양이지만 나는 그래도 소음이 어느 정도 나는 선풍기가 더 좋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그 돌아가는 날개 소리를 가만히 흘려듣고 있으면 겨울에 하는 '불멍' 못지않다.


어렸을 때 우리 집엔 아주 오래된 선풍기가 하나 있었다.

아마 그 시절 다들 그런 선풍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투박하고 거친 디자인에 몇 번을 고치고 고친 새파란 날개를 가진 선풍기 말이다.

그 녀석은 시동이 느렸다.

콘센트를 꽂고 버튼을 누르면 윙~ 하는 긴 기계음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날개는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러다 잠시 후 마지못한 듯 아주 천천히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내 헬리콥터가 이륙하는듯한 소리를 내며 기운차게 돌아간다.

그걸로 여름 준비는 끝이었다.

겨울엔 솜이불도 꿰매야 하고 연탄도 몇 백장씩 준비해야 하지만 여름엔 그저 헬리콥터 소리를 내는 선풍기 하나만 꺼내놓으면 충분했다.


더위가 깊어지면 한 대뿐인 선풍기의 '회전'기능이 매우 유용하게 쓰인다.

온 가족이 한 방향으로 앉아 있을 순 없으니 선풍기의 회전 반경에 맞춰 가족 모두 열을 지어 앉아 다들 자기 차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회전하는 선풍기가 나를 한 번 지나 다시 내쪽으로 돌아오는 게 왜 그리 더디던지... 그리고 지날 때는 왜 그리 빨리 지나는지...

그럴 땐 나도 모르게 회전하는 선풍기의 머리를 따라 내 머리도 같이 움직이곤 했는데 바람을 기다리는 다른 가족의 앞을 막기 일쑤라 돌아오는 건 바람이 아닌 핀잔이었다.

어머니는 움직이면 더 더우니 가만히 있으라고 하시곤 했다.

돌아가는 날개 앞에 앉아 '아~~~'하는 소리를 내며 놀기도 하였다.

아~~ 소리가 선풍기 날개를 통과해서 바르르 떨리며 들려오는 게 신기하고 재밌었었다.

무섭기도 했었다.

돌아가는 선풍기에 손가락을 넣었다 잘렸다는 이야기에 잔뜩 겁을 먹어 선풍기가 돌아갈 때 머리 부분을 손으로 잡는 걸 조심 또 조심하곤 했었다.


지금 있는 선풍기는 헬리콥터 소리도 나지 않고 버튼을 누르면 망설임 없이 바로바로 잘 돌아간다.

지금 쓰고 있는 글도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면서 쓰고 있다.

문득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기계이긴 하지만 나를 위해 저렇게까지 헌신적으로 움직여주는 게 또 있을까?




아니다. 많다.

생각해 보니 정말 많다.

티비도 세탁기도 컴퓨터도 냉장고도 모두 헌신적으로 움직여주고 있다.

싱크대도 세면대도 화장실의 변기도 모두 헌신하고 있다.

생명 없는 것들이 생명 있는 것 이상의 헌신을 바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참 가진 게 많다.

더 필요한 게 없을 정도로 가진 게 많다.

그리고 그 속에 잘 살아있는 내가 있으니 이 정도면 부러울 게 없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내일이면 다시 수많은 광고에 눈이 돌아가고 더 멋진 물건에 관심을 가지겠지만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나는 아무도 부럽지 않고 아무것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그리고 참 고맙다.

선풍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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