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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해 <이솝 우화>

온기는 바깥으로 퍼져간다

by 천우주


바람과 해 <이솝 우화>


어느 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자랑하던 바람이 해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봐이봐, 내가 얼마나 강한지 알아? 마음만 먹으면 세상 모든 걸 다 날려버릴 수도 있어. 어때? 너도 그럴 수 있어?"

바람의 말에 해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그 모습에 바람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때 마침 바람의 눈에 저 아래 어떤 남자가 두꺼운 외투를 입고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바람은 남자를 보자 좋은 꾀가 떠올랐다.

"해야, 나하고 내기하지 않을래? 내가 이기면 세상에서 제일 강한 건 바람이라고 크게 얘기해 줘. 그럴리는 없겠지만 만일 내가 진다면 해가 세상에서 제일 강하다고 나도 얘기해 줄게, "

그런 바람을 보고 해는 여전히 미소만 지었지만 바람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다.

"자, 저기 저 아래 걸어가고 있는 남자가 보이지? 저 사람이 입고 있는 외투를 벗기면 이기는 거야, 어때? 좋지? 그럼 내가 먼저 시작할게."

바람은 자신만만하게 말을 뱉더니 이윽고 양볼이 터질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남자를 향해 무섭게 입김을 불기 시작했다. 바람의 입김에 조용하던 세상이 웅웅 거리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강한 돌풍이 남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길을 가던 남자는 느닷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두 손으로 외투를 꼭 여미며 걸었다.

한 번의 입김에 남자의 외투가 날아가지 않자 초조해진 바람은 몸 전체를 부풀어 올리더니 더욱더 세찬 입김을 남자에게 불기 시작했다. 남자는 더욱 거세진 바람에 조금 전보다 더 단단히 외투를 잡고 걸어갔다.

두 번의 시도에도 남자의 외투를 벗기지 못한 바람은 화가 단단히 나서 정말 온 힘을 다해 입김을 불었다. 흙먼지가 요란하게 일고 나무가 뽑혀 날아가며 남자마저 집어삼킬 기세로 거센 폭풍이 불었지만 남자는 바람 앞에 머리를 숙인 채 몸을 잔뜩 웅크리고는 더욱더 단단히 외투를 잡고 버텼다.

마침내 바람은 힘이 빠졌다.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화로워지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던 남자는 외투를 잡았던 손을 놓고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친 바람은 해에게 차례를 넘겼다.

"흥. 내가 못했는데 네가 할 수 있으려구. 그래도 내기는 내기니 어디 너도 한 번 해봐."

해는 바람이 멎어 조용해진 지상으로 따뜻한 빛을 내리쬐기 시작했다.

차가웠던 대지에 따스한 열기가 조금씩 퍼지더니 이윽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걷던 남자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해는 자신의 따뜻함을 보다 더 내리쬐었다.

아지랑이가 사방에서 솟아나고 뜨거운 열기가 지상을 완전히 덮어갔다.

남자의 이마에 송골히 맺혀 있던 땀은 어느새 흐르는 땀으로 변했다.

남자는 더워진 날씨를 못 참고 외투를 벗었다. 그 모습을 본 바람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길을 가던 남자는 더위에 못 이겨 외투는 물론 겉옷까지 하나 둘 벗기 시작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위의 글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바람과 해님'이란 동화입니다.

기억에만 의존해 적었기에 원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을 듯싶습니다.

이 동화가 생각난 까닭은 어떤 이의 부고를 접하고서입니다. 어떤 부고든 생 하나가 저물었다는 사실은 슬프고 안타깝게 다가오지만 그중에도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의 부고는 더욱 슬프고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살다 보면 그럴 때가 있습니다.

웃을 수밖에 없어서 웃을 때. 웃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웃을 때, 고독과 슬픔이 가슴을 온통 메워버렸지만 그럼에도 웃음밖에 지을 수 없을 때, 그 웃음마저 잃는다면 모든 걸 잃을걸 알기에 어쩔 수 없이 웃을 때.

또 그럴 때도 있습니다.

화사하게 만개하는 꽃들이 미울 때, 가족의 다정한 미소가 무서울 때, 친구들의 밝음이 몸서리치게 싫을 때, 태양과 생명과 푸르름이 내 목을 졸라올 때.

그리고 그럴 때도 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는 게 두려울 때, 실수로 흘린 물에 마음이 무너질 때, 길을 가다 잠깐 멈췄는데 다시 걸어갈 수 없을 때, 발 끝에 걸린 돌부리에 모든 게 무너질 때, 사소함 하나에 내 존재 모두가 부정당할 때.


바람은 강합니다. 바람은,

모든 걸 찢고 부수고 망가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마음에 불어닥친 바람은 잠잠함과 거셈을 번갈아가며 사람을 뒤흔듭니다. 그럴수록 외투를 더욱 단단히 여미고 몸을 웅크린 채 바람에 저항하지만 너무 강한 바람이 계속되면 결국엔 무너집니다. 꽁꽁 언 손으로 외투를 꼭 쥔 채, 그렇게 얼어붙어 죽어갑니다. 강하고 변덕스런 바람 앞에 생명은 촛불과도 같습니다. 바람은 입김 한 번으로 그 촛불을 언제든 꺼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람은 생명을 앗아갈 순 있어도 생명을 지키고 키워내진 못합니다. 꽁꽁 언 채 죽어가게 할 순 있어도 결코 외투를 벗겨내진 못합니다.

반면 해님의 강함은 다릅니다. 해님은,

찢고 부수고 파괴할 순 없지만 몸과 마음을 열어 하늘을 바라보게 할 수 있습니다. 얼었던 몸을 녹이고 꺼져가는 촛불을 살릴 수 있습니다. 두꺼운 외투와 거추장스런 겉옷을 스스로 벗어내게 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해님은 모두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눈빛과 표정으로 바람을 일으킬 수도 햇빛을 비출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나와 상대를 상처 줄 수도, 상처를 아물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당신의 차가움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차가움이 누군가를 절망케 했을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의 비보에 홀씨만큼의 무게를 더했을 수도 있습니다. 홀씨 같은 작은 차가움은 미미하지만 수많은 타인의 차가움이 쌓이고 쌓인다면 그것은 결코 미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의 친절이, 또 배려가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차가움에 생채기난 마음을 미약하게 감싸줬을 수도 있습니다. 병아리의 노란 깃털에서 느껴지는 연약한 따뜻함을 나눴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아니 분명 그럴 것입니다.

살아가게 하는 건 분노와 차가움이 아니라 친절과 따뜻함입니다. 나는 인간의 역사가 전쟁과 재난과 질병을 헤쳐가며 오늘까지 이어져 오는 건 그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종교, 과학, 예술, 이념, 이데올로기 모두 중요하지만 그 근간에 따뜻함이 있기에 사람은 아직 살아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당신이 따뜻함을 나누지 않았다면 세상은 유지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이들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그들의 마음에 세상에 떠도는 그 온기가 닿지 않았으니까요. 온기 대신 차가움이 그들에게 닿았을 테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만 더 따뜻해져야 되지 않을까요? 나는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차가움은 송곳처럼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지만 따뜻함은, 온기는 바깥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갑니다. 따뜻함은 가둘 수 없습니다. 내 안의 따뜻함은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바깥을 향해갑니다. 당신의 따뜻함은 가만히 두어도 스스로 나에게 다가옵니다. 온기가 온기와 만나면 더욱 따뜻한 온기가 됩니다. 차가운 겨울밤 불도 없는 산속을 혼자서는 버티지 못하지만 온기를 나누는 두 개의 생명은 버틸 수 있습니다.


봄의 목전에 다다른 2월의 밤.

모두의 마음에 따뜻함의 작은 햇살이 비춰 들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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