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겨울. 깜깜한 밤. 시간은 9시.
매서운 바람이 윙윙대지만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거실은 평온하다.
나는 놀이에 지쳐 잠이 든 아이를 조심스레 안아 침대에 눕힌다.
세상모르게 잠든 아이의 하얀 이마.
빛나는 그곳에 입 맞추려다 마음을 거두고 거실로 돌아온다.
남편은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통통하고 하얀 손에 리모컨을 쥐고 무심히 목살을 드러낸 채.
티비를 끌까 하다 그대로 둔다.
나는 식탁으로 다가가 조용하고 세심하게 의자를 빼고 앉아 노트를 편다.
새하얀 종이와 볼펜 한 자루.
모두가 잠이 든 거실.
얼마만의 평화인가?
문득 눈을 들어 집안을 둘러본다.
흐트러진 장난감과 스케치북, 찌그러진 맥주캔과 과자들. 주인을 잃어 멈춰버린 사물들.
멈췄기에 다투지 않고, 다투지 않기에 평화롭다.
갑자기 들려오는 웃음소리.
틀어놓은 티비에서 연예인들 몇 무리가 웃어댄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참을 수 없는 듯 웃는다. 세상 가장 즐거운 얼굴.
하지만 아니다. 그들은 즐겁지 않다.
웃음 가득한 그 눈 깊숙이엔 긴장과 피곤만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저들은 왜 그렇게 피곤하게 웃는 걸까? 누굴 위해? 무얼 위해?
주인은 이미 잠들었는데.
나는 전원을 끄기 위해 조심스레 일어나 티비로 향한다.
'앗....!'
발을 내딛는 순간 뾰족한 통증이 머리 끝가지 전해진다. 아이의 블럭 하나.
나는 간신히 비명을 삼키고 어질러진 사물들을 쏘아본다.
그들은 여전히 평화롭다. 주인을 잃었기에.
안다. 치워야 한다. 언제가 되었든 치워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오랜만의 이 평화에 조금 더 머물러야 한다.
나는 다시 조용하고 세심하게 식탁으로 돌아와 새하얀 종이 옆의 볼펜을 집어든다.
오늘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마음의 이야기. 그리고 옷가지들.
옷가지? 그래 옷가지들. 발치옆에 쌓여있는 옷가지들, 개어지길 기다리는 옷가지들.
주인 잃은 사물들.
나는 볼펜을 들어 이야기를 쓴다.
겨울밤, 알맞은 온도로 데워진 평온한 거실, 나의 평화...ㅍ
평ㅎㅘ..ㅇ....ㅈ.....
지.....ㄱ......ㄸ...
볼펜이 다 되었나?
딸칵, 딸칵딸칵 딸칵!...
ㅍ....ㅕ..... ㅎㅇ.....ㅏ....
탁! 탁탁탁!! 딸칵 딸칵
슥 슥슥슥슥 스으으윽 슥 슥슥
부우우우욱욱
볼펜의 끝이 노트를 찢는다.
다 되었나 보다.
새 볼펜으로 바꿔야겠다.
그런데 새 볼펜은 어디에 있을까?
거실을 둘러본다.
장난감, 스케치 북, 찌그러진 맥주캔과 뒤엉킨 옷가지들.
통통하고 하얀 손에 쥐어진 리모컨.
이마를 반짝이며 잠이 든 아이.
목살을 드러내고 잠이 든 남편.
딸칵 딸칵 딸칵!!
슥슥 북 부욱 부우욱 북북!!
새 볼펜은 어디에 있을까?
아니,
다 쓴 볼펜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딸칵 딸칵
"와하하하하하하 그렇군요"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티비에서 다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남편이 뒤척인다.
리모컨은 그대로다.
장난감과 맥주캔도 그대로다.
옷가지도 그대로다. 여전히 그대로다.
매서운 바람이 윙윙대지만 알맞지 않은 온도로 데워진 거실은 숨이 막힌다.
다 쓴 볼펜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딸칵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볼펜심이 거칠게 왕복한다.
날름 대는 혓바닥 무기력한 혓바닥.
뾰족함만 남아버린 쓸모없는 폐기물.
남편이 다시 뒤척인다.
새하얗고 통통한 손에 리모컨을 쥐고.
새하얗고 통통한 목덜미를 드러내고
부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ㄱ.....
.
.
.
다 쓴 볼펜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나는,
힘을,
다해,
볼펜을 쥔다.
딸. 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