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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그리고 일상

2021년 05월 29일

by 천우주

넷플릭스에서 '주피터스 레거시'란 시리즈를 잠시 보았는데 흥미로워 보여 시청했지만 내 취향은 아니어서 중간에 시청을 포기했다. 그런데 거기서 나왔던 대사 중 인상 깊었던것이 있었다.


"가까운 사람에게 돌아가세요, 함께 있으면 위안이 되잖아요. 마음을 바로잡아주고...."


힘이 들면 가까운 사람에게 돌아가 위안과 용기를 얻고 치유를 받으라는 조언이 담긴 대사였다.

삶에 지쳐 힘겨울 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찾아갈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임에 분명하다.

사람은 어디를 향하든, 무엇을 하든 결국은 지치게 되어있다. 그럴 때 몸을 쉬게 하고 마음을 일으켜 세워주는 존재가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안정을 취하고 용기를 새롭게 해 살아갈 힘을 다시 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결핍'이라 부르는 것의 정체가 어쩌면 '가까운 존재의 부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헤맨다.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존재를 찾아, 장소를 찾아.

그런 존재 혹은 장소를 '중심'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심은 파란만장한 인생이란 굴곡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고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어떤 상황에도 삶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이 인정을 하든 하지 않든 '중심'을 가진 존재다. 각자의 힘겨움에도 꿋꿋이 삶을 버티며 나아가고 있으니.

흔히 영혼은 자유롭다고 한다. 분명 그렇다. 물리적 공간에 사로잡힌 육체와 비교해 영혼은 끝없이 자유롭다. 우리의 육체는 거대한 우주 속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지구라는 작은 별에 매여있지만 영혼은 우주의 경계까지도 단숨에 날아갈 수 있다. 그뿐인가. 시간도 초월해 빅뱅을 바라보고 끝없는 우주의 종말도 감상할 수 있다. 이처럼 자유로운 존재인 영혼. 영혼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의식이나 정신, 혹은 마음으로 불러도 좋다.

하지만 영혼이 아무리 자유롭다한들 그것의 중심은 육체고 육체가 없는 영혼은 아무리 자유롭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육체없는 영혼이 될 수 있는건 기껏해야 괴담속 등장하는 유령정도다.

육체 역시 마찬가지다. 물질에 얽매여 형상과 의미를 부여하는게 육체지만 그 속에 영혼이 담겨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물'일 뿐이다. 영혼 없는 육체가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생물의 순환에 필요한 거름 정도다.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 육체가 없는 영혼. 그것들은 그저 한낱 '사물'이며 '개념'이고 무기력한 '현상'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영혼은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이며 동시에 둘이다. 앞면과 뒷면으로 완성되는 동전이다.

삶과 중심의 관계도 그렇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중심, 자신이 돌아갈 곳은 있다. 다만 잃어버렸을 뿐이고 착각했을 뿐이다. 못찾는 것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는 종종 헤매고 실수한다. 아닌 것에 돌아가고 그른 것에 의탁한다.

법정 스님의 글 중 '함부로 인연을 맺지 마라'에 이런 말이 나온다.

진실을 아는 사람에게만 진실로 대해야 하며
그런 사람들과만 인연을 맺어야 한다.

이 말엔 여러 뜻이 들어있을 테지만 힘들고 지쳤다 하여 아무 곳에나 쉬어서는 안 된다는 뜻도 분명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또한 헤매고 헤맬지라도 진실한 것을 찾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단추를 잘못 꿰면 결국은 어물쩡한 차림새가 되고 만다. 과녁을 향하지 않은 화살이 과녁에 날아가 맞을 순 없다.


그렇지만 잃어버린 중심, 보이지 않는 진실한 인연을 찾아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스님의 말씀처럼 진실한 사람에게만 진실로 대해야 하건만 진실한 사람이 어디에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사람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지쳐 쓰러진다. 팔을 뻗어 누구라도 붙잡고 만다. 잘못된 것이라도 말이다.

이게 맞는걸까? 어쩔 수 없는 일일까?

아무리 헤매고 헤매도 돌아갈 장소도, 팔 벌려 맞아줄 사람도 찾지 못한다면 더이상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쓰러져 누워버려 이대로 세상이 끝나기만 바라야 하는가?

생이 작별을 얘기할 때까지 힘없이 매 순간을 살아가야 하는가?

거짓에라도 몸을 맡겨 이미 쪼그라 버린 영혼을 더욱더 작게 만들어 바스러트려야 하는가?


그럴 순 없다. 그래선 안 될 것이다.

살아있는 것의 가장 우선은 '살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므로 '품위'를 유지한 채 살아가야 한다. 비록 내면엔 어두운 마음과 생각들이 끊임없이 생동하며 떠돌지라도 그것들을 잘 다스려 승화시켜 내보이는 '품위'를 가져야 한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더라도 내 안 어딘가, 세상 어딘가엔 나의 중심과 나의 편이 있으니,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니 허리를 곧추 펴고 정면을 당당히 바라보며 품위와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인간이 괴담에나 등장하는 악령이나 귀신들과 다를게 뭐 있겠는가? 썩어가는 사물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품위란 지식이나 재물의 많고 적음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대하는 자세, 타인을 대하는 자세, 그리고 나를 대하는 자세, 품위는 거기에서 나온다.

돌아갈 곳과 위안이 될 사람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면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나는 우선 자신의 일상을 단단히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되는대로 이어 붙인 일상이 아닌, 바름에 기반한, 그리고 품위에 기반한 일상을 조금씩 단단히 쌓아 가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상이 단단하면 흐트러지는 마음을 보다 단단히 잡을 수 있을 테다. 그렇게 단단해진 일상이란 배를 타고 삶의 여정을 헤쳐가며 잃어버린 집과 진실한 인연을 찾아 여행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오래 만들어 온 일상이 부서진 지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부서진 나의 일상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품위를 얘기하고 자세를 얘기하고 단단한 일상을 얘기하였지만 나는 아직 그것을 갖추지 못했다.

지난 일 년간 수시로 흔들렸고 휘청이며 넘어졌다.

품위가 있는 단단한 일상. 언제쯤 그런 것이 다시 자리 잡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런 일은 영영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괴담 속 유령으로 살아갈 순 없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나는 그런 일상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들일 것이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지 않고선 제대로 된 무엇도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내 삶을 통틀어 배운 것 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겠다.

나는 믿는다. 어딘가에 반드시 나의 안식이 되어줄 것들이 있을 것이라고. 그곳에 닿기 위해 단단한 일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루와 하루를 지나면서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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