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09일
온라인으로 선풍기를 하나 주문했다.
선풍기 한 대로는 한 여름을 나기 힘들 것 같아 미리 주문한 것이다.
고급 제품은 아니다. 리모컨 없이 수동으로 조작되는 기본적인 선풍긴데 그것만 해도 올여름을 제법 잘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선풍기도 에어컨도 없던 시절엔 도대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본다.
부채도 귀하던 옛날에는 도대체 어떻게 더위를 견뎌냈는지 신기하다.
하긴 아무것도 없는 시절이니 아무것도 기대치 않았을 것이고 기대가 없었으니 더위는 있어도 불편함도 없었지 싶다. 그저 더워하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 시절엔 아마도 조금의 그늘이 에어컨이었고 약간의 바람이 선풍기였을 테다. 냇가나 우물가에서 뒤집어쓰는 한 바가지 찬물이 피서였고 말이다.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도 귀했던 시절이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 시절 많은 이들이 여름이 오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지냈다.
'문발'이라 불리는 가림막을 출입문에 달아놓고 문은 활짝 열어놓는 것이다.
형편이 조금 괜찮은 집은 대나무로 만든 발을, 형편이 좀 못한 집은 나일론으로 된 발을 걸어 놓았다.
물을 활짝 열어놓은 통에 도둑이 들었다는 집도 있었다.
우리 집도 두어 번 정도 도둑이 들기도 했었다.
도둑이 들었다는 동네의 집들도 그렇고 우리 집 역시 가져갈 것 하나 없는 집임에도 도둑은 기웃거렸다.
사생활도 드러나고 벌레도 많이 들고 도둑도 기웃대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문을 닫고 지내진 않았다.
사생활도 벌레도 도둑도 삼복더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에어컨은커녕 멀쩡한 선풍기 1대라도 있는 집이 드물었다.
어떤 집은 부러진 날개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 썼었고 어떤 집은 부러진 선풍기 목에 테이프를 칭칭 감아 쓰기도 했었다. 소리는 또 어찌나 크던지.
그때의 선풍기는 선풍기가 아니라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였다.
광광광광광광 하며 돌아가는 그 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그런 선풍기조차 없는 집도 많았고 우리 집 역시 있을 때도 있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선풍기 1대 있기도 힘든데 2대 가진 집은 더욱 귀했다.
한 여름이 오면 온 식구가 방바닥에 널브러져 선풍기의 회전 기능 하나에 의지해 버텨내곤 했다.
대개 엄마와 아빠는 선풍기 반경의 좌우 끝에 있었고 아이들은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다.
열대야는 그야말로 사람의 진을 빼놓았다.
더위에 지쳐 땀을 흥건 흘리며 이리 뒤척 저리 뒤척이다 뒤척임에 지치면 얼굴에 맺힌 송글한 땀을 느끼면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그래도 다들 잘 살아내었다.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학교를 가고 집에 돌아와 잠이 들었다.
에어컨도 없었고 선풍기 한 대도 귀했지만 그 시절 일상을 아무렇지 않게 살아내었다.
선풍기가 귀했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좋았다는 건 아니다.
선풍기가 귀했던 그 시절이 지금보다 나빴다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절엔 그 시절대로 살았고 지금은 또 지금대로 사는 것이다.
선풍기가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다.
에어컨이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다.
좀 더 크고 좋은 냉방 시설이 있다면 보다 쾌적한 여름을 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없다고 아쉽진 않다.
내겐 없는 것들이니 없는 것에 아쉽진 않다.
경험하지 않은 걸 어떻게 아쉬워할까.
나는 그저 내게 있는 것들로 잘 살았으면 한다.
많은 걸 바라는 대신 있는 것만으로 잘 지냈으면 한다.
새 선풍기 하나를 사면서 오만 생각이 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