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할머니 그녀의 첫사랑
어디서 지내시나요 한세월 흘렀네요
어린 시절 뛰놀던 언덕 위에 이렇게 서있죠
바람이 불어오네요 큰 나무도 춤추네요
햇살 받아 환하던 그 아이의 모습 보이네요
이젠 내가 아니에요 추억만 내게 남았어요
부끄러워 감아버린 내 눈가에 눈물만 흘러요
바람이 불어오네요 큰 나무도 춤추네요
햇살 받아 환하던 그 아이의 모습 보이네요
이젠 내가 아니에요 추억만 내게 남았어요
부끄러워 감아버린 내 눈가에 눈물만 흘러요
부끄러워 감아버린 내 눈가에 눈물만 흘러요
노래 링크: https://youtu.be/6LafrMbV9GI
따뜻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이 머무는 동네 어귀 나지막한 오후의 언덕.
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로 뒷짐을 지고 언덕 위에 서서 바람에 살랑이며 춤을 추는 큰 나무를 본다.
좁고 가는 어깨는 세월의 무게를 담담히 흘러 보내듯 아래로 늘어트렸고 주름진 얼굴은 삶의 기록을 정직히 드러내고 있다. 나무를 바라보던 늙고 바랜 할머니의 눈이 조금씩 방향을 바꾸어 간다. 할머니의 눈은 이제 나무도 하늘도 아닌 다른 어떤 곳을 바라본다. 추억이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추억의 공간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늙고 바랜 작은 눈에 어느새 젊은 생기가 아른거리고 이내 몸 전체를 감싼다.
구부정한 허리가 어느덧 꼿꼿해지고 곱게 빗어 넘긴 백발은 풀어진 흑단처럼 검게 변해 찰랑거린다. 힘을 잃은 어깨는 희망으로 반짝이고 검었던 얼굴엔 복사꽃 마냥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난다. 어느새 언덕 위의 할머니는 소녀로 변하고 그녀의 주변으로 봄꽃들이 춤을 춘다.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눈을 감는다. 감은 눈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눈물이 흐른다.
추억만큼 아름다운 그녀의 눈물이.
할머니는 처음부터 할머니가 아니었다. 사람들의 관심 속에 세찬 울음을 터트리며 태어난 아기였고 맛난 젖을 먹으며 엄마의 품속에서 자라난 아이였다. 조금 더 커서는 뒤뚱한 걸음마로 동네를 쏘다녔을 테고 아이들과 놀았을 것이며 온몸에 흙을 묻히고 돌아와 야단도 맞았을 것이다. 힘든 일도 많았을 것이다. 좋은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이답게 자라 어느새 소녀가 되고 여인이 되고 그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 남자를 사랑했을 테다. 그 남자는 분명 잘 생기고 남자다워 동네 인근의 모든 소녀가 우러르던 사내였을 게다. 사내는 많은 소녀가 보내는 연모의 눈빛을 뿌리치고 그녀를 택했다. 그건 아마도 그녀가 가진 순수하고 맑은 눈빛 때문이리라.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그 맑은 눈빛. 둘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정녕 그랬다. 그러나 아름다움은 한때이니 둘의 사랑도 불처럼 타올랐다 애석히 끝이 났다. 그래도 고고히 폈다 지는 벚꽃처럼 아름다운 이별이었다. 분명 그랬을 거다.
'나의 할머니 그녀의 첫사랑'
예민.
지금 세대는 생소할 수도 있는 싱어송라이터이지만 90년대를 지나온 사람이라면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한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란 노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노래는 그의 5번째 앨범의 맨 마지막 트랙에 수록된 노래이며 이 음반을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음반을 만들지 않았다. 노래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이 노래는 실제로 처음부터 끝까지 할머니가 불렀다. 그래서 더욱 감동이 짙게 다가온다. 그가 직접 노래를 불렀어도 분명 좋은 노래가 되었을 거지만 아마도 지금 같은 감동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가수가 자신의 앨범에 다른 사람, 그것도 가수가 아닌 할머니를 보컬로 넣을 생각을 하다니 참 대담한 선택이다.
언덕에 선 할머니는 언덕과 큰 나무, 그리고 추억이 그대로인 걸 발견한다. 그 속에 그 사람도 그대로이다. 변한 건 자신뿐. 그리곤 잠시 눈물을 흘린다. 가장 멋진 모습의 첫사랑 앞에 세월이 한참 지나 섰으니 그랬으리라. 그래도 괜찮을 테다. 그녀는 그녀로서 살아갈 테니. 그렇게 지나갈 테니.
그리고 우리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