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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제8일의 밤'

번민과 번뇌에 관한 이야기

by 천우주
8일의밤02.jpeg 8일의 밤(2021)


감독: 김태형

출연: 이성민, 박해준, 김유정, 남다름, 김동영, 이얼 등



영화는 한 요괴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붉은 눈과 검은 눈을 가진 요괴.

요괴는 자신의 사악함으로 세상을 파멸시키려 하였으나 부처님에 의해 깊이 봉인당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긴 시간이 흘러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영화는 붉은 눈과 검은 눈을 가진 요괴와 그것에 얽힌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8일의 밤은 요괴가 나오고 기분 나쁜 일들이 일어나고 종교와 오컬트가 뒤섞인 어두운 분위기의 기괴한 영화지만 뒤집어보면 인간의 욕심에 관한 이야기다. 그중 번민과 번뇌에 관한 이야기다.

붉은 눈과 검은 눈의 요괴가 세상을 차지하면 세상이 지옥이 되듯 번민과 번뇌가 마음을 차지하면 스스로가 지옥이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는 공포가 아니다. 성내고 화내며 욕심내는 마음에 대한 경고이며 그것에 대한 화두이다.


한밤중 놀라서 잠이 깬 청석에게 하정 스님은 이렇게 얘기한다.


나쁜 꿈을 꾸었느냐? 청석아
지나간 일은 좋든 나쁘든 모두 허망할 꿈일 뿐이란다"


청석이 잠에서 깬 이유는 번민과 번뇌 때문이었다. 그런 그에게 스님은 무심히 위로와 치유의 말을 건넨 것이다. 과거에 얽매이지 말고 지금을 살라는.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 모두는 번민과 번뇌를 안고 있다. 그들에게 세상은 이미 지옥이다. 붉은 눈과 검은 눈의 요괴는 이미 그들의 마음을 건너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영화에서 독특한 인물 중 하나는 '애란'역의 김유정 배우다.

대사 하나 없이 오직 분위기만으로 신비함과 처연함을 연기하는데 그게 또 잘 어울린다.

다 보고 나면 곡성이 떠오르기도 한다. 소재도 그렇고 인물들도 그렇고 곡성과 꽤 비슷한 면이 많은 영화다. 그렇지만 곡성과는 또 다른 매력을 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쉬운 부분도 있었다. '퇴마 스님'이란 소재를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다. 선화 스님의 퇴마 능력에 대한 기대를 잔뜩 부풀리기는 하지만 정작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진 못한다. 형사역의 박해준도 그렇다. 극 중 내내 보여줬던 뭔가 있어 보이는 모습과 달리 너무나 허무한 퇴장을 보여준다. 애란에 대한 스토리도 짧아 정작 그의 선택에 공감이 가질 않았다. 아마도 여러 차례에 걸친 편집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제한된 시간에 너무 많은 걸 보여주려다 보니 전체 연관성이 조금은 느슨해지지 않았나 한다.

그런 의미로 이 작품은 영화보단 시리즈나 책으로 나오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웹툰도 좋고 말이다. 이야기와 구성을 좀 더 쌓아 올린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재밌는 영화이고 잘 만든 영화다. 공감이 안 간다고는 했지만 결말 부분도 좋다. 각자의 번민과 번뇌를 각자의 방식으로 치유받기 때문이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제8일의 밤에서 '8'은 포스터에서처럼 가로로 누우면 무한의 기호와도 같다고 한다.

이는 무한히 반복되는 고통과 치유의 연속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붉은 눈과 검은 눈의 요괴. 요괴의 두 눈 역시 기호화하면 무한이 된다.

어둠이 뒤덮였다 다시 물러가고, 다시 또 어둠이 드리우고....


번뇌와 번민에 대해 선화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기다리며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일을 '번민'이라 한다.
번민하는 자의 눈은 빛을 잃어 검다.
지나간 것을 떠올리며
잊지 못해 슬퍼하는 것을 '번뇌'라 한다.
번뇌하는 자의 눈은 분노로 붉다.


검은 눈과 붉은 눈의 요괴. 번민과 번뇌의 눈을 가진 요괴는 실상 우리의 마음 그 자체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오지 않은 것에 괴로워하는 것.

지난 일을 후회하고 과거에 잡혀 괴로워하는 것.

그것은 우리가 늘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요괴나 귀신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우리 안에 있고 우리가 만들어 낸다.

미래와 과거를 끊어내고 오직 지금, 여기, 현재에만 있는 것이 바로 지옥을 벗어나는 일인 것이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파이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런데 그게 정말 진실입니까?"

그의 물음에 파이는 아주 짧게 진실을 이야기한다.

몇 시간에 걸쳐 들려줬던 자신의 이야기를 단 몇 분만에 다 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가 더 마음에 드십니까?"


엎서 말했듯 이 영화는 요괴 영화도 아니고 오컬트 영화도 아니고 불교 영화도 아니며 공포 영화도 아니다. 사람의 욕심에 관한 얘기, 그중 번민과 번뇌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를 왜 이리 온갖 것들을 덧씌워 풀어내었을까? 그 많은 고서와 설화에 나오는 이야기 역시 오직 인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왜 신화와 환성으로 온통 채워져 있을까?

그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에는 생명이 있다. 그렇기에 이야기의 목적은 단 하나다. 살아남는 것.

오랫동안 기억되어 살아남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목적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목적이기도 하다.

우리는 온갖 공상과 환상으로 덧씌워진 이야기들에서 흥미와 매력을 느끼며 다가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이것은 바로 나의 이야기구나. 사람의 이야기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제8일의 밤.

영화를 본 뒤 자신의 번민과 번뇌를 한 번쯤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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