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09월 24일
일주일 전부터 뵈어온 어르신의 부고를 접했습니다.
이른을 좀 넘긴 나이셨으며 암 투병 중 별세를 하시게 되었습니다.
직접 조문을 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유골은 평소 본인의 말씀대로 원하시던 곳에 뿌려드렸다고 합니다.
사후 세계나 윤회가 존재하는지는 저의 짧은 지식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것들의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부디 편안하게 영면하시길 바라봅니다.
부고를 접하고 그 분과 그 분의 삶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세대 많은 분들이 그렇듯 이 분의 삶도 결코 녹록하진 않으셨습니다.
젊은 시절 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며 그 후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힘겹게 살아오셨습니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많은 아이들을 여자 혼자의 몸으로 건사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그렇지만 경험치 못한 일이기에 제가 감히 그 고됨의 깊이까지는 헤아리지는 못합니다.
살아계실때 가끔 그 분을 뵐때면 간혹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힘들었던 결혼 생활, 홀로된 여자의 몸으로 거친 세상과 부딪히며 힘들었던 것, 노동의 고됨 등을 얘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들을 통해 한 사람이 걸어왔던 고난의 생을 조금 짐작해보기도 했었습니다.
이 분도 한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 중 하나셨습니다.
배우기 싫어서가 아니라 가난해서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가난한 집 대부분이 그러했으니까요.
그 시절 딸은 내 속에서 나온 귀한 자식이기는 하지만 집안의 미래를 이어가고 성장시키는 존재가 아닌 어느 정도 성장해 혼처가 생기면 떠나보낼 일종의 예약된 '타인'이었었습니다.
그렇기에 당장에 끼니를 해결하기도 급급했던 가난한 사람들에게 딸을 교육시킬 경제적 여유도 그럴 이유도 없었습니다.
끼니 걱정을 하던 형편인 만큼 한 명의 '입'을 줄이는 것도 가난한 집엔 큰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시절 많은 가난한 이들이 택한 방법이 어린딸을 '식모살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식모살이란 형편이 부유한 다른 집에 일종의 가사 도우미로 보내는 것을 말합니다.
식모로 머무는 동안 숙식을 제공하는 것외에 급여는 없습니다.
당시의 식모 살이란 그런 것이었고 숙식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혜택이었으니까요.
식모살이를 보내는 집에선 입을 하나 줄이는 것이니 좋았고 식모살이를 가는 아이는 집에서보다 음식을 잘 먹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의 생각이었습니다.
밥을 잘먹는지, 매를 맞진 않는지, 구박을 당하진 않는지 하는 것들은 모두 판단의 뒷전에서 얼굴도 비치지 못합니다.
지금에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그 때는 그게 말이 되는 일이었고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이를 보낼 때 얼마간의 쌀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도 식모를 받는 집의 마음에 달린 것이라 보내는 집의 입장에선 데려가 주는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겼었습니다.
이 분 역시 식모살이를 하셨다고 합니다.
당시 나이가 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라고 합니다.
이렇게 나이 어린 식모를 당시엔 애기 식모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렇게 남의 집에서 일을 하던 어느 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참을 수 없어 그 집을 도망 나왔다고 합니다.
무작정 나왔던터라 어디로 가야 집이 나오는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그래도 철길 옆이 집이라 어린 마음에 기찻길을 따라가면 되겠지 생각하고 철길만 따라 며칠을 걸어 결국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며칠을 밥도 제대로 못먹고 울다 놀다 엉망이 된 얼굴로 보고 싶은 엄마를 부르며 울면서 집으로 달려갔지만 돌아오는 건 아버지의 노여움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께 혼이 났지만 다시 식모로 돌려보내지는 않으셨다고 합니다.
나의 부모님 세대들이 살던 상황이 대개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 부모님들이 지금보다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분명 그 애정은 존재했었겠지만 다만 양육이나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념이나 생각이 그 당시에는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었을 뿐입니다.
지금에야 그런 일들이 용납되지 못할 일이겠지만 당시엔 그저 평범한 일이었으니까요.
어쩌면 지금은 모두가 용납되는 어떤 일들도 몇십 년이 흐른 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야만적인 일이 될 수도 있겠지요.
어느 날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하신 적도 있었습니다.
국민학교를 조금 다니다 집안일을 도우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는데 학교 가는 아이들이 그렇게 부러웠다고 합니다.
친구도 없이 혼자 꾀죄죄한 몰골로 우물가나 냇가에 앉아 집안일을 하고 있노라면 깔끔하게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하하호호 거리며 등교를 하는 모습이 참 부러웠다고 합니다.
성장해서의 삶도 그리 평화롭지는 못하셨습니다.
경제적 관념이 없는 남편을 만나 본인이 이리저리 일을 하며 겨우겨우 생계를 꾸렸고 그나마 남편이 제대로 된 일을 좀 하려고 할 무렵 그만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세 명의 어린 아이들과 가난만이 남아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고생하며 살아오신 탓에 끈기와 타고난 지혜가 있으셨던 분이시라 이 일 저 일을 하시며 아이들을 키우고 모두 장성시키셨습니다.
좋은 모습이 많은 분이셨지만 나쁜 모습도 그에 못지않게 많은 분이셨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인생의 굴곡들을 삐뚤어진 방식으로 풀어 이래저래 원성도 많이 들으신 분입니다.
분명 원하는 당신의 모습은 그런 것은 아니었겠지만 삶이 주는 고됨은 자신이 바라는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타인과 가족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기도 하셨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밖에 스트레스를 풀 수 없으셨던 거겠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치유될 수는 없습니다.
그분을 통해 배우게 된 것 중 하나는 어쩔 수 없는 행위라고는 해도 그것이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를 결코 정당화시키지 못한다는 거였습니다.
타인에게 준 상처는 어떻게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진정으로 깨닫고 용서를 구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그 용서도 상대가 허락해야 가능하지만 최소한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며 용서를 구한다면 그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을지라도 옅어질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다른 상처를 더 늘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좋은 면도 많으셨습니다.
항상 올곧게 사시려고 노력하셨으며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걸 무엇보다도 싫어하셨습니다.
또 본인이 힘들게 살아오셔서 비슷한 처지에 있는 분들을 보면 말이라도 한마디 더 챙겨주려고 하셨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검소하신 분이셨습니다.
먹고 입는 것들까지 아끼고 아끼셨으니까요.
그렇게 아끼고 아껴 자식들 몰래 돈을 모아두었습니다.
자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아프기 전까지 막일을 비롯해 온갖 일들을 하시면서 아끼고 아낀 돈들이었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이 보기엔 그저 얼마 안 되는 돈이겠지만 제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평생 몸으로 일하고 몸으로 벌며 어렵게 모은 돈이라 금액에 상관없이 참 대단하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분이 가시는 날까지 들었던 병원비며 장례비용들까지 모두 그 돈으로 해결했으니까요.
정말 자식들에게 십원 하나 피해를 주지 않고 떠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떠나셨습니다.
여기서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해 전부를 얘기할 순 없겠지만 그분 나름대로의 치열함으로 살다가 떠나셨습니다.
그분의 인생이 행복했는지 어땠는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중학교 때 친척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더랬습니다.
명절이나 제사 때마다 들리는 큰집 할아버님이셨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다녔던 그 집의 할아버님은 저에겐 그저 무섭고 엄한 기억만 많은 분이셔서 장례식에서도 딱히 슬프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가까웠던 분이 돌아가신 건 그때가 처음이고 장례식을 끝까지 있어본 것도 처음이라 그 기억이 오래 남습니다.
그때 처음 '죽음'이란 것에 대해 좀 깊이 생각해봤었습니다.
당시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왜 우리는 죽은 사람에게 이처럼 경의를 표해야 하는가?'
궁금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슬퍼하고 위로하는 거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왜 그처럼 장례식장에서 입관식에서 엄숙하고 슬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할아버지를 묘소에 안치할 때 저는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은 한 인간으로 태어나 인생을 어떻게 살았냐가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낸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예우이다. 그것에 대한 일종의 경의를 표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가 누구든 죽음의 문턱을 넘은 망자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표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살다가 떠날 인간이기에'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부고를 접할 일이 많아집니다.
그중에는 수명을 다하고 가시는 분들도 있었고 병마나 사고로 안타깝게 가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인생은 참 짧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적었던 '때'에 대한 일기도 사실 이 분의 부고를 접하게 되고 하게 된 생각입니다.
오래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문간에 기대어 문 밖 멀리로 보이는 도로의 자동차들을 보며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돌아가겠지?'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세상은 여전히 흘러갑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영원히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는 돌아갈 겁니다.
내가 세상을 떠나도 세상을 돌아가겠지만 내가 떠나는 날 아버지 이후 돌아가던 세상도 내가 있을 때 돌아가던 세상도 모두 끝이 납니다.
그 이후의 세상은 그 이후의 사람들에 남겨지는 거구요'
삶과 죽음이 무엇이라 단정 짓지는 못하겠습니다.
그걸 알만큼 나는 지혜롭지 않습니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은 잘 살아가고 싶습니다.
하루를 잘 보내고 나면 편안한 잠에 들 듯이 한 생을 잘 보내고 나면 편안한 죽음에 들 수 있다는 어떤 현인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직장을 그만두기로 한 날이 다가왔습니다.
직장을 그만두고 열흘 정도 혼자 여행을 가보기로 했습니다.
돈도 없고 일을 놀아야 될 상황도 아니지만 내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한 번 더 생각해보고 싶어서입니다.
나는 아직 살아가야 하고 또 잘 살아가고 싶으니까요.
생을 살고 떠나신 모든 분들이 편안한 영면에 드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