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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양현 Mar 08. 2018

정부지원금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마약

달콤하기도 씁쓸하기도 했던 7년 동안의 소기업 창업일기

좀비기업은 가차 없이 퇴출되어야 한다...    
      

안철수 대표가 정치에 입문을 앞두고 한창 주가를 올리던 2012년, 그가 쓴 안철수의 생각이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책에서 한국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다양한 생각들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중 한 대목을 읽고 가슴이 뜨끔했다. 나라의 공적자금으로만 버티고 있는 경쟁력 제로의 한계기업 이른바 좀비기업은 가차 없이 퇴출되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윤을 창출할 역량이 없고 공적자금으로 버티고 있는 회사들이 과감히 청산되어야만 나라의 경제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당시의 나는 창업을 하고 1년이 안된 상황이라 회사 살림이 궁색하고 변변치 않았다. 이 때문에 정부지원금을 좀 타 먹어보려고 정부지원사업들의 제안서를 부지런히 쓰고 있던 중이었다. 책을 완독한 후 그가 말하는 좀비기업에 내 회사가 해당하는 것 같아 마음이 적잖이 쓰렸다.     


회사 사정이 좋아지면 정부지원금 따위는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했었다. 장기적인 정부지원금 의존은 기업의 경쟁력을 낮추고 체질개선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나 창업 후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부지원금 사업을 끊지 못하면서 내 다짐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정말 마약도 이런 마약이 따로 없다. 캐시카우가 안정적인 비즈니스를 영위하고 있거나 대규모 자금 투자를 기반으로 창업한 회사가 아니라면 3개월 뒤 1년 뒤를 기약할 수 없는 소기업들에겐 정부지원금은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마약인 것이다. 가혹하게 퀄리티를 요구하고 수시로 요구사항이 변하며 저작권도 없는 용역사업과 달리 정부지원금 기반의 사업은 회사가 자체 기획을 가지고 진행하기 때문에 100% 저작권을 소유하게 되고 결과에 대한 부담도 덜하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선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다들 지원금 근처를 반복적으로 기웃거리는 것이다. 우리 분야를 지원하는 대표기관인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망해버리면 대한민국의 콘텐츠 기업 중 절반은 도산할 거라고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를 동종업계 대표끼리 하곤 했다. 매해 연초에 열리는 각 부처의 정부지원사업 설명회에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들 생각은 다 똑같다. “올 한 해도 콩고물을 뜯어먹을 게 없을까?”라고 말이다.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정부지원금. 오늘은 이 뜨거운 감자를 다뤄보고자 한다.          



정부지원사업이 만들어지는 과정     


정부지원사업은 사업의 기획, 심사와 선정, 사업의 관리 이렇게 삼위일체로 구성된다. 창업 후 나는 본의 아니게 정부지원사업의 속내를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내가 영위하는 사업분야의 전문가랍시고 사업 자체를 만드는 기획과 자문과정에도 참여해보았고 직접 사업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어 다른 업체 제안의 심사도 해봤으며 직접 정부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사업을 진행해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지원금 기반 사업과정과 집행구조에 대해서 매우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고 되었다. 일단 정부지원사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획 과정을 살펴보겠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문화체육관광부, 중소벤처기업부 산하의 다양한 기관들은 내 업종인 디지털콘텐츠 분야와 관련된 다양한 지원사업을 담당한다. 이외에도 K-Startup이라는 창업포털에 가면 수많은 정부지원사업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정부지원사업은 지원기관의 사업 실무담당자와 해당 전공분야의 대학교수,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연구원, 기업의 대표 같은 이들로 구성된 몇 번의 자문회의와 토의, 외부 의견수렴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물론 사업 실무담당자가 부지런하다면 직접 발품을 팔아 전문가들을 쫓아다니며 의견도 듣고 콘퍼런스 같은 것도 참여해서 기획을 자체적으로 주도할 수도 있다. 혹은 주무부처인 미래창조과학부나 문화체육관광부를 통해 낙하산 형태로 사업들이 내려올 수도 있다.      


사업의 기획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산출되는 결과물은 RFP라고 부르는 제안요청서다. 지원사업의 형태, 규모, 성격, 목표 등 모든 제반사항을 적어놓은 공식문서다. 담당기관은 RFP를 기반으로 자체 홈페이지에 지원사업공고를 낸다. 물론 RFP는 기업과 산업현장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서 이들의 니즈를 기반으로 도출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RFP를 만드는 과정 속에서 내용에 손을 대는 교수, 연구원, 기업대표 같은 이들의 입김이 직간접적으로 작용하면서 RFP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왜곡되기도 한다. 즉 현장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말 그대로 지원사업을 위한 지원사업 형태로 기획이 변질되는 것이다. 사업 중 일부는 산업의 육성과 기업의 경쟁력 향상이라는 지원사업의 순수한 의도가 오염되어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지원금을 그냥 공중에 뿌리는 식의 결과를 종종 초래한다.      

    


정부지원 사업의 심사와 선정과정     


뭐 어쨌든 기획이 되었다 치자. 그러면 담당기관은 지원사업 공고를 낼 것이다. 지원사업과 관련된 분야를 영위하고 있는 회사나 신규사업에 관심 있는 회사는 당연히 사업에 눈독을 들일 것이다. 그런데 나랏돈이 눈먼 돈이라는 이야기는 먼 옛날이야기다. 지금은 정부지원금을 받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다. 해마다 지원금을 받고자 하는 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져서 경쟁률이 10대 1이 넘어가는 사업들도 예사고, 선정과정도 서류심사, 발표평가, 현장평가처럼 복잡다면화되어 있다. 나 역시 수많은 고배를 마셨다. 정부지원금이 필요한 기업들의 절실함을 이용해 지원금을 손쉽게 따게 해준다며 접근하는 일종의 브로커도 생겨났다. 운 좋게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사업을 관리하는 과정이 쉽지 않은 편이다. 사업을 하는 중간에 진도평가를 받아야 하고 사업비를 집행하는 과정도 까다롭다.      


심사와 선정과정은 민간사업에 비해 비교적 객관적이고 투명하다. 그러나 여기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매년 크고 작은 잡음들이 발생하고 있으며 기관은 수시로 심사선정과정을 점검, 보수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잡음은 당연히 특정인을 배제하는 블랙리스트처럼 눈에 잘 드러나지않는 여러 입김과 압력, 그리고 심사과정 자체에서 기인하는 구조적 허점 같은 것들이다. 지원사업 기관들은 보통 자체적인 심사인력 풀을 확보하고 있다. 인력 풀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자체적으로 수집하거나 정식으로 진행된 심사위원 모집과정을 통해 확보한 리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인력 풀 안에 들어있는 심사위원들은 각자의 전문영역으로 분류되어 있다. 예를 들면 컴퓨터공학, 디지털 콘텐츠, 영화제작, 애니메이션 이런 식이다. 심사위원을 뽑을 때는 사업에 지원한 업체 측 사업책임자의 출신학교나 이전 직장동료 같은 이해타산자를 필터링한 후, 관련 분야의 심사위원을 인력풀에서 랜덤하게 뽑아 진행한다. 선발된 이들은 주로 대학교수, 연구기관의 연구원, 산업계의 전문가인 업체대표나 사업의 책임자급 종사자들이다. 사업 내용의 특수성에 따라 심사구성원이 달라지기도 한다. 지역의 콘텐츠 지원사업이라면 해당 지역의 전문가, 사업화가 중요하면 마케팅 전문가, 저작권이 중요한 사업이라면 변리사 같은 전문직종인이 포함되기도 한다.     



간만 훑을 수밖에 없는 심사과정     


심사과정에서 정부지원사업의 여러 맹점이 존재한다. 일단 선발된 심사위원은 사전에 자신이 무슨 사업에 심사를 해야 하는지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사업담당자가 전화로 “선생님께서 몇월 며칠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는데 가능하냐”라고 묻고 전화를 받은 이가 가능하다고 이야기하면 해당일에 심사평가장을 방문해서 심사를 하는 식이다. 심사위원은 보통 당일날 심사평가장에 도착해서야 심사할 내용을 알게 된다. 업체들이 몇날 며칠을 공들여 쓴 제안서류를 검토하는데 주어지는 시간은 1시간이 채 주어지지 않는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회사의 제안서를 봐야 하는 것이다. 물론 맡은 심사가 전문 분야라면 대충만 훑어보아도 해당 기업이 사업에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공 분야가 아니라면 1시간이 채 안되는 시간에 읽어야만 하는 제안서는 독해할 수 없는 외국어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


선정된 사업이 잘 진행되었는지를 최종 평가하는 심사 자리도 마찬가지다. 사업은 짧게는 수개월 길게는 1년이 넘을 때도 있다. 그렇다면 사업을 하는 동안 다양한 자료들이 축적되어 있을 텐데 이런 자료들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것은 쉽지 않다. 심사위원들은 심사일 당일 도착해서 대충 한두 시간 결과보고서를 훑어보기 때문이다. 결국 심사위원들은 심사의 구조상 심도 있게 사업내용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대충 간만 보는 식으로 심사를 하게 된다.    

 


국문학과를 다녔는데 왜 이 R&D 사업을 신청했죠?

심사위원이라는 완장     


전문분야를 감안해서 심사위원을 선별한다고는 하지만 현대의 산업과 기술은 매우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특정 사업에 정확하게 매칭 되는 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선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사업과 무관한 이나 비전문가들이 종종 심사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심사를 받는 기업 입장에서는 매우 운이 나쁜 것이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심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도 심사장에 가서 내가 잘 모르는 분야를 심사해봤다. 심사장에 도착해 제안서를 주욱 훑어봤는데 온통 모르는 전문용어들 뿐이었다. 나는 당연히 제안 내용에 대한 심도 깊은 질문을 할 수 없었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몇 가지를 물어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떤 심사위원들은 분위기 상 한마디라도 아는 척을 해야 하고 트집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해당분야의 비전문가인데도 불구하고 대충 내용을 훑어본 깜냥으로 사업책임자를 가르치려 드는 월권행위를 하거나 사업과는 전혀 무관한 황당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심사기간 동안만큼은 업체를 좌지우지할 권력을 가졌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매섭고 혹독하게 업체를 몰아붙여 분위기를 안 좋게 몰고 가거나 인격침해성 발언을 일삼는 이도 있있다. 옆에서 심사를 했던 내가 듣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코멘트를 사업책임자에게 쏟아내는 이도 여럿 목격했다. 몰지각한 심사위원 한 사람으로 인해 심사 분위기가 흐려지기 시작하면 사업을 제안한 회사는 선정이 안될 확률이 높다.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회사에 대해 매우 네거티브 한 인상을 주면서 심사 자체가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5년 전의 일이다. 3D 입체영상을 쉽고 빠르게 촬영할 수 있는 장비를 개발하는 기획을  R&D 사업에 낸 적이 있다. 서류심사를 통과하고 운 좋게 최종 질의응답까지 도달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심사평가장 안으로 들어가니 심사위원들이 사방에서 매섭게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가까스로 의자에 앉았다. 진땀을 흘리며 심사위원들의 질문에 디펜스를 하고 있는 가운데 내 귀를 의심하는 질문 하나가 날아왔다.     


“이력을 보니 국문학과를 다녔네요?”

“네. 맞습니다.”

“국문학과를 다녔는데 왜 이 R&D 사업을 신청했죠?”     


황당했다. 학부가 인문 쪽이니 R&D 사업을 신청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을까. “위원님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시나요!” 하고 이 참에 확 들이받을까 하다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고 대답했다.     


“대학원에서 관련 분야 공학 공부도 했습니다.”

“그래도 과제를 잘 못할 거 같은데요. 이쪽 출신도 아니라서...”     



나는 차분하게 내 프로필을 늘어놓았다. 대학원에서 해당분야의 정식 공부를 했고 다양한 연구 프로젝트의 연구책임자로도 일을 했으며 논문이나 책도 썼다고 말이다. 그러나 해당 심사위원은 내 대답이 변명처럼 들렸는지 수긍이 안된 눈치였다.     


해당 업체가 역량이 안된다고 심사위원이 판단하면 자신 앞에 있는 평가지에 낮은 점수를 주면 된다. 이력 몇줄에 근거한 자의적인 판단을 가지고 면박을 줄 필요성이 있을까? 질의를 받는 당사자는 회사의 대표나 혹은 해당 사업을 주관하는 책임자 급 위치에 있는 이들일 테고 나름대로 그 분야의 전문가일 것이다. 해당분야에 있어선 심사위원들보다도 권위자일 확률도 높다. 짧은 시간 동안 완장 놀이를 하고 있는 소위 전문가라는 이들의 적나라한 인격을 여러번 목격하면서 나는 내 눈을 몇 번이나 의심했다.  내가 아는 대표 중에는 수모를 견디지 못하고 심사위원들과 대판 싸우고 나오는 이들도 있었다. 지원금을 타려면 꾹  참고 수모도 감내해야 하지만 성질에 못 이겨 스스로 부러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업기관의 입장에서 헤아려본다면 이런 심사평가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작용들이 얼핏 이해도 된다. 해마다 기관 안에서 수십, 수백 개의 크고 작은 사업들이 돌아갈 테고 담당자는 심사평가를 사업마다 진행해야 한다. 심사위원이 하나의 제안을 검토하는 데는 한 시간이 채 안되지만 여러 기업들이 낸 제안을 모으면 심사하는데 반나절 혹은 하루를 꼬박 잡아먹는다. 이렇게 되면 기관 입장에서 심사의 효율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실제 산업의 종사자가 아닌 기관의 담당자 입장에서 심사위원들의 전공분야를 자세히 확인하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여러 구조적 문제 때문에 쉽게 개선되지 않는 심사평가는 부작용을 낳으며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다.



사업의 집행과 관리     


심사평가라는 치열한 난관을 뚫고 지원사업에 선정되면 선정 통보를 받은 당일은 잠시나마 기쁨에 취한다. 그러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사업의 집행과 관리라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행정 우선주의 식의 다양하고 복잡한 페이퍼워크와 요식행위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정부지원금을 기반으로 한 사업은 워낙 문서작업이 많아 사업을 전담하는 직원을 별도로 채용하는 경우도 많다. 지원금이 1원이라도 나가면 일일이 증빙서류를 올려야 하고 출장이나 회의를 했을 때도 비용과 관련 내용, 근거를 적어야 한다. 예산을 변경하고자 할 때는 사전에 변경 신청을 해서 허락을 맡아야 한다. 수시로 사업에 대한 진도와 상황에 대해 보고도 해야 한다. 일을 하는 담당자 입장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사업을 하는 건지, 그냥 예산지출을 관리하는 금전출납 업무를 하는 것인지 사업 본래의 목적을 헷갈리게 되고 일일이 감독을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에 사업의욕을 점점 상실하게 된다. 선정된 사업을 통해 그럴듯하게 시제품을 만들고 사업화를 진행하겠다는 화려한 꿈은 어느덧 사라지고 복잡한 번거로운 집행관리업무에 파묻히면서 의욕 자체가 저절로 사그라드는 것이다. 2017년에는 국고보조금의 부정수급을 방지한다는 목적으로 E나라도움이라는 빅브라더도 생기면서 기관의 관리감독이 더욱 강화되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국고보조금과 지원금과 관련된 정부의 방침은 늘 해마다 왔다 갔다 한다는 것이다. 마치 시소처럼 말이다. 기업지원이라는 사업 취지와 달리 너무 행정편의주의로 업무를 진행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면 정부기관은 어쩔 수 없이 규제를 약간 풀어준다. 그러다가 국고보조금을 빼돌려 걸린 부도덕한 기업들이 국정감사의 이슈가 부각되거나 뉴스에 보도라도 되면 이번에 기업을 감시하고 죄는 쪽으로 규제를 강화한다. 이렇게 기관은 여론이나 혹은 국회, 이익단체에 떠밀려 시소의 무게중심을 이쪽저쪽으로 옮긴다. 내 생각에 정부기관은 기업들의 부도덕한 사례를 사전에 원천봉쇄, 억지한다는 측면보다는 상황을 관리하고 개선해나간다는 관점으로 사업을 진행할 필요성이 있다. 여론에 휩쓸려 바다에 떠다니는 배마낭 이리지리 정책 포지션을 옮기지 말고 자금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방향으로 기업을 유도하는 전략을 써야 한다.


정부지원금을 대하는 기업의 사고방식에도 사실 많은 문제가 있다. 기업들에게 욕먹을 각오로 이야기하면 기업들 사이에 일종의 도덕덕 해이가 만연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업화를 위해 요긴하게 지원금을 쓰는 게 당연하지만 정부 돈을 타 먹어 인건비를 메우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제안의 시작은 창대했지만 막상 결과물은 별 볼 일 없는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는 경우도 다반사다. 지원금이 요긴하게 쓰여 기업의 사업에 도움이 돼야 하는데 실제 사업화로 연결되어서 성공한 사례는 그다지 많지 않다. 정부가 국민의 세금을 걷어 막대한 양의 지원금을 내려부었지만 그 안에서 성공하는 것은 소수에 불과한 것이다. 엄청나게 큰 농장에 씨를 잔뜩 뿌렸는데 달랑 꽃 몇 송이 정도가 핀 꼴이다. 그래서 최근엔 구체적인 사업화 진행과 이에 관련된 결과를 지원기관에서 요구하고 있는 추세다.     


또 회사의 역량은 별 볼 일 없는데 그럴듯하게 제안서를 잘 쓰고 멋들어지게 PT를 잘해서 정부지원금을 수시로 타내는 회사들도 존재한다. 우리끼리는 이런 업체를 국고헌터라고 부른다. 국고헌터들은 정부지원사업쯤은 옛날 정부미 타 먹는 수준으로 쉽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어쩌겠나. 따박따박 사업에 선정되어 지원금을 타가는 꼴은 얄밉지만 제안서를 잘 쓰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니 누구를 탓하랴.          



정부 주도의 성장모델     


정부는 기업의 R&D나 사업화 지원에 국고보조금이라는 항목으로 매년 막대한 세금을 쏟아붓고 있다. 이러한 정책기조는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을 가리지 않고 유지되고 있다. 우리는 해마다 정부가 특정 신사업, 혹은 기술개발에 수백, 수천억 단위의 예산을 투여해 지원하겠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런 상황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하면 한국은 미국식의 자율모델보다는 여전히 정부 주도의 성장모델을 고수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21세기의 한국 정부는 4차 산업 혁명이니, 창조경제니 하는 어젠다를 앞세워 여전히 정부 주도의 경제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권력이 시장에 완전히 넘어간 현재의 상황에서 정부가 오판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적극적인 경제 개입에 대한 비판론자들이나 시장주의자들은 정부지원금이 장기적으로는 경제의 자율성을 막고 기업의 자생력을 해치는 것이라고 본다. 그들 말마따나 정부지원금은 인풋 대비 아웃풋이 보이지 않는 이른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가 저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에서 이야기했듯이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모델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부의 다양한 산업 지원책이 한국의 산업과 경제를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더아나가 선진국에 진입하게 한 원천이기도 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하긴 힘들다. 정부지원금 역시 산업에 대한 기초 인프라 구축과 문화예술 콘텐츠 분야의 보편적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원금은 당장의 결과와 직결되진 않지만 사업화나 R&D가 쉽지 않은 영세 소기업에겐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고 생존이 절실한 어떤 기업에게는 분명 단비와도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정부지원금은 국민 세금의 낭비가 아닌 황무지에 가까운 땅에 지속적으로 거름을 주어 조금씩 개간할 수 있는 땅을 만들어주는 일이다.


막강한 자금과 시장지배력을 쥐고 있는 헤비급 대기업을 상대로 맨몸의 허약한 스타트업을 링에 올리는 것을 공평하다고 말하는 이는 누구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지원금이란 펀치를 견디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인 헤드기어와 마우스피스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당장의 생존과 존립이 중요한 기업에게 그것만큼 절실한 게 또 있을까? 비록 그것이 마약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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