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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Mar 31. 2019

까치 장례식, 까치 사냥

무엇이 옳은지,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까치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날아다닐 때는 잘 못 봤는데, 긴 꼬리 부분이 어두운 녹색으로 광택이 났다. 그늘에 앉아있던 청딱따구리 녹색이 생각났다. 아파트 주변에 그렇게나 많은 까치를 보았으니, 사체 한 마리 발견하는 게 확률적으로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체가 눈에 띄어야 할 텐데, 어디로 가는 걸까? '해체' 전문가인 독수리가 이곳 아파트 단지까지 올 리는 없을 테고,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포식자가 있어 말끔하게 해치우는 것일까? 까치 같은 작은 새의 수명이라야 5~10년이란다. 만수무강이야 사람이나 동물이나 드문 경우니까 이 녀석은 얼마나 살았을까. 한 5년?

이 아파트 단지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사는 걸까. 이 아파트의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야 노련한 공인중개사가 다 헤고 있을 터지만, 까치가 살다 죽는 것에 대해서는? 누군가는 헤아리고 있겠지? 자연이라고 할 수도, 아니라고 할 수도 있는 이곳 아파트 단지의 생태계는 어떻게 돌아가고 있을까. 봄이 오자 생을 하직한 까치 한 마리와 봄을 맞아 이사를 오고가는 아파트 단지의 이사 사다리차를 보고 드는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하나 더. 까치 장례식. 까치는 동료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러준다는데, 아까 그 까치는 왜 홀로 쓰러져있었을까? 어치나 까치 같은 텃새나 기러기 같은 철새도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듯한 단체행동을 한다. 철새인 기러기는 다친 동료가 회복하거나 죽을 때까지 돌보느라 무리의 몇 마리가 귀향길을 늦추기까지 한다. 새들뿐 아니라 코끼리나 고래 같은 포유동물도 동료의 죽음에 대해 특별한 의식을 가지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아래 글을 한번 보자.


"캐나다 캘거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포플러나무에 날아와 가지에 앉던 까치 한 마리가 무슨 이유에선지 포장도로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5분 안에 까치 십여 마리가 주검 주변에 모이더니 둥글게 둘러쌌다. 주검을 쪼거나 하는 행동은 없었다. 한 마리는 주검에 다가가 부리로 가볍게 건드리고 떠났다. 나머지 새들은 약 5분간 그 자리에 머물다 일제히 날아갔다. 이들은 특이한 죽음을 맞은 동료에게서 어떤 정보를 얻으려 한 것일까, 아니면 의식적인 모임이었을까. 이 관찰은 학술지에 보고된 것이다." (한겨레 신문 기사 http://ecotopia.hani.co.kr/58514)


올초에 겪은 일이다. 강둑에서 바닥에서 쓰러진 까치 한 마리 발견. 아직은 움직이는 것이 뚜렷해 다가가서 까치를 살폈다. 이때 반대편 강둑으로 걸어오는 누군가가 있었으니, 또한 이 까치를 향해 오는 발걸음. 주황색 조끼를 걸친 그는 다가오자마자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한전'에서 까치를 잡으러 다니는데, 이게 전기를 끊기도 하고 아주....." 그래서 합법적으로 까치를 사냥하는 것이었다. 한두 번 설명한 것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왜 까치를 잡나 하고 생각하고 이상한 눈길부터 보냈을 테니까. 그가 내세우는 정당성은 한전 그리고 까치가 위해 동물이란 사실이었다. 비둘기처럼 사람에게 친숙해진 우리 동네 까치였는데. 이처럼 사람 입장에서 본 자연은 양면성이 있다. 아무튼 그에게서 '까치 장례식' 이야기를 처음으로 들었다. 동료가 죽으면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까치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까치를 전깃줄이나 전봇대가 있는 부근에서 쫓기 위해 총을 쏜 것인데, 더 모여들면 안 된다. 일이 꼬이기 전에 신속한 현장 정리가 필요하다.

얼마 후에 어디 기사에서 까치 사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수입된 생태교란종 쥐 뉴트리아를 없애기 위해 마리당 포상을 하는 것처럼. 무엇이 옳은지,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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