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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randol Mar 02. 2019

봄은 오고,
기러기는 떠나고

기러기 수가 뚝 줄었다. 3월이니 당연한 일이다. 봄이 오면 매화가 피는 것처럼, 기러기는 돌아가야 할 길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편대 비행으로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가 모두 귀향길에 오른 것처럼 보였다. 


지난겨울은 기러기에 대해 많이 알고, 많이 보기도 했다. 거의 매주 한 번씩, 기러기가 잠에서 깨어나 하루를 여는 때부터 시작해서 먹이활동을 하는 낮까지. 물안개 피어오르는 호숫가에 자리 잡은 기러기떼는 환상적이었고, 특유의 V자 편대로 하늘을 나는 장면은 언제나 장관이었다. 사실 그것보다 더 볼만한 것은 수백 마리의 기러기떼가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장면이다. 저것이 살아있는 새들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 후에 기러기가 편대를 지어 나는 이유와 사람들이 말하는 의미도 알았다. 공기역학적으로 더 쉽게 날기 위해서라는 과학적인 지혜와 선두를 이끄는 기러기의 리더십에 대한 예찬이었다. 인터넷에는 리더십 같은 단어에 환장하는 몇몇 사람들의 기러기 찬양이 무한 반복되는 중이었고 괜히 낯부끄러웠다. 물론 수만 킬로를 날아와 길을 잊지 않고 귀향하는 철새의 능력은 놀라웠고, 세대를 이어 이 같은 귀향을 되풀이해야만 하는 철새의 팔자를 생각해 보는 것은 의미 있었다. 


망원경 속의 기러기는 거의 항상 무언가를 끊임없이 먹고 있다. 논에 떨어진 낱알을 주워 먹는 것이다. 물론 습지에 앉아서 식물을 뜯고, 때로는 작은 저서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지만. 큰기러기 같은 경우는 열댓 마리씩 따로 발견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쇠기러기는 수십수백 마리씩 앉아있다. 이렇게 많은 기러기가 먹을 만한 낱알들이 과연 있기나 한 것일까. 몇 번 바닥을 살펴봤지만 내 눈에 먹을 거라곤 보이지 않았다. 어쨌거나 기러기들은 계속 고개를 주억거리며, 주워 먹는 것을 일삼았다. 이것을 존재의 보편 이유라고 했던 어떤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일생이 먹고사는 일이다. 나와 참 비슷한 경우라고나 할까. 하루하루 먹기 위해 사는 건지, 살기 위해 먹는 건지, 기러기의 삶과 비슷한데, 기러기는 그닥 힘들어 보이지 않다는 것이 다르다. 게다가 별다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게 참 중요하다. 그들이 일생 정해진 자신의 삶이나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종종 한 탓에 쇠기러기와 큰기러기를 구분하는 내 능력의 향상은 초라했다. 더 우울한 것은 이제 대충 그 두 종을 알만큼 되었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먹기 위해 사는 삶의 변화는 없을 듯하다는 사실.  

기러기떼가 날아오른다. 한 번에 와르르 날아오르기도 하지만, 그전에 뭔가 낌새가 보이는 경우가 더 많다. 경계심을 가진 불안한 기러기 몇 마리가 주춤하다 날면, 불안은 순식간에 감염되고 모두가 동요가 에너지가 되어 날아오른다. 사실 새가 난다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항공기도 이륙할 때 전체 연료의 반 이상을 사용한다고 하지 않나. 그러니 겨울 들판의 낱알 몇 개를 찾아먹은 힘으로, 중력을 거스르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큰 새일수록 더 그렇다.  물론 정말 불안한 건지 기러기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당연히 많은 수가 날면 날수록 더 멋지고,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매우 볼만하다. 

두루미나 재두루미처럼 큰 새가 가족을 이루고 먹이활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면 뭔가 엿보는 재미와 호기심에 계속 집중하게 된다. 슬로모션처럼 우아한 움직임이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기러기가 떼로 비상하는 순간은 그냥 멍하게 바라보게 된다.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벌떼를 보며 '마치 인간의 영혼이 육신을 빠져나오는 이미지를 보는 것 같다'라고 했다는, '발도르프 교육'으로 널리 알려진 독일의 인지학자 루돌프슈타이너가 생각난다. 지금은 많이 바랬지만, 고개를 들고 날아오르는 기러기를 볼 때의 아득한 그 느낌이 좋다. 올 가을 기러기떼를 다시 볼 때는 또 그런 기분 맛볼 수 있겠지. 

단조롭게 먹기 위해서 머리를 주억거리는 것과 날개를 펴고 창공을 날아오르는 모습은 참 반전이다. 새를 관찰할 때도 그랬다.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몇 가지 특징을 찾아 그걸 금과옥조처럼 챙기다가, 나는 모습을 보면 저게 뭔지 간신이 외운 기존 지식이 쓸모 없어지는 것 같아 당황한 적이 많다. 색도 달라 보이고, 날개 안쪽에 있던 색이 드러나면서 다른 느낌으로 보이기도 했다. 다른 새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청둥오리는 그냥 있어도 특별한 색이 뚜렷하지만, 떼로 나는 모습은 물가에 앉아있을 때와 또 다른 멋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모습만으로도, 큰기러기인지, 쇠기러기인지 구분하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인다. 몇 해 더 있으면 알게 될까? 아주 가끔 몇 마리 보인다는 캐나다기러기, 흑기러기, 줄기러기, 흰이마기러기, 흰기러기 .... 아직 얼굴도 못 본 기러기들은 언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사람들은 봄을 기대하고, 철새는 벌써 떠나거나 바삐 짐을 싸는 중이다.  빨리 출발한 팀은 저기 러시아 너머 아무르강 가 고향에 도착하였는지 몰라. 귀향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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