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간을 받아들인다는 것.
바닥 걸레질을 하다가 주운 머리카락 하나. 반은 하얗고 반은 갈색빛이 도는 내 머리카락이다.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2년 간 내 생활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올 들어 시작된 흰머리 받아들이기, 즉 이제 더 이상 염색하지 않기도 그중 하나다.
아빠는 50대 초반에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이발소에서 항상 염색을 하셨다. 유전의 힘인지, 거기에 더해진 직장생활을 스트레스 때문인지 20대 후반부터 무섭게 늘어가는 흰머리 탓에 난 항상 염색을 해야 했고 작년까지도 최소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을 찾아가 염색을 했다. 아, 물론 H를 임신했던 기간에 유일하게 염색을 하지 않았고 유난히 나에게 흰머리가 많다는 것을 인지한 것도 그때였던 거 같다.
20/30대의 나에게 염색은 흰머리를 감추는 용도라기보다는 패션이었다. 허니브라운, 내추럴 브라운, 오렌지, 애쉬 브라운.. 등등 다양한 색을 시도했다. 하지만, 40대 중반에 접어든 순간 염색은 젊어 보이기 위한 수단이었다. 내 나이에 비해 흰머리가 많다는 것도 염색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였다.
염색을 그만두고 흰머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배경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은퇴를 결심하고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기로 했고 매달 미용 항목으로 지출되는 염색 비용이 아깝게 느껴졌다. 요즘 한국도 펌이나 염색 비용이 만만치 않겠지만 미국의 미용실은 더 비싸다. 거기에 미국의 이해하기 힘든 팁 문화 덕분에 추가 비용이 들어가는 셈이다. 나의 경우 한 달에 $100 정도의 비용을 염색에 지출하고 있었다. 고정지출로 매달 감당하기엔 큰 금액이라고 생각했다.
40대 초반에 탈색을 해 본 경험이 있다.
더 늙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들은 다 해보자는 마음에서 시도했었고 탈색해 은발에 가까운 머리로 2년 남짓을 지냈다. 염색을 멈추기로 결심한 데는 이 경험도 영향을 줬다. 인위적으로 탈색해 은발로도 만드는 마당에 그냥 염색을 하지 않아도 멋스러운 은발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다. 거기엔 강경화 장관이나 메릴 스트립 같은 멋진 여성들의 영향도 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적어졌다. 즉, 지저분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일 일이 많지 않다.
직장생활을 여전히 하고 있고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은 상황이었다면 행동에 옮기기 어려웠을 거 같다. 뿌리부터 자라기 시작한 흰머리가 전체를 덮기까지의 과정은 아름답지 않다. 아니, 추레한 인상을 줄 거다. 다행히 은퇴 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고 운동을 가거나 H를 라이드 해주거나 마트에 장 보러 가는 일 외에는 외출이 없는 편이다.
염색을 멈춘 지 근 5개월, 아직 멋스럽게 느껴지진 않지만 조금 더 자라면 남아있는 염색 모발을 잘라낼 수 있을 거 같다. 여전히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긴 하지만 이것도 용기니까, 잘 참아내고 있는 나를 칭찬해주고 싶다. 거기에 작지만 절약한 돈으로 생활비에 보탬이 될 수 있으니, 그것도 좋은 일이고.
흰머리를 받아들인다는 건 나에겐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변화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게 어렵다는 걸 새삼 느낀다.
내 나이 47. 마음보다 앞서가는 신체의 변화에 우울해지지 않도록, 나를 위로하며 멋있게 나이 먹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