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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24. 2018

이상한 사이

<100일 글쓰기 97/100>

고교 시절 전교생이 150명 남짓할 때가 있었다. 개교 후 첫 기수인데다 모두 산골짜기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다른 반 친구들도 어렴풋이 얼굴과 이름을 매칭시킬 수 있을 정도였다. 오다가다 보는 일도 잦고, 아침 운동은 다같이 한데다 동아리 활동이라든가 점심시간 축구 같은 걸로 서로서로 친한 사이가 되기 좋았다.
공학인데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부모님도 안 계시니 열일곱들 마음에도 친구에 대한 연애 감정 같은 걸 꿈꾸기 수월했을 것이다. 누가 누굴 유심히 보더라, 관심을 갖더라 하면 주변에서 부추기기에도 좋았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대학교 신입생 때 봄 내내 떠도는 광기 어린 연애 바람과 비슷했는데 우린 그걸 좀 이르게 겪었던 것 같다.) 척 보기에 다소 거친 인상의 옆 반 애에 대해 '걔 상냥하던데? 안 무서워.'라든가 하는 코멘트를 했었다. 어느 날부턴가 그 애 주변의 친구들을 주축으로 모두가 우리를 엮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굴었다. 급식실에 밥을 먹으러 가면 이미 배식을 받아 자리에 앉아 식사 중이던 걔 주변 애들이 짓궂게 아는 척을 해댔다. 그야말로 전교생이 부담을 주던 시절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렇게 미묘한 첫 '사귀는 사이'라는 걸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이상해서 걔랑 눈도 제대로 못 마주쳤고 말을 걸어도 대충 대답을 하고 도망 다녔다. 투박한 손길로 정성들여 썼을 게 분명한 손편지를 몇 차례 받고도 제대로 답장을 쓴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시작한 사귀는 사이는 한 달 남짓 어색하게 지속되다 종내에 더 이상하게 끝나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하게 지냈던 다른 애와, 이번에는 전교생 중 3분의 1 정도가 바람을 잡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그 또한 이상하게 시작되었다 이상하게 마무리되었지만.
타인의 연애가 궁금할 시절. 타인의 연애사에 바람을 잡는 것만으로도 흥분되고 기분이 들뜨는 시절. 돌이켜보면 내게 첫 사랑이란 게 너무 늦었기 때문에 그런 시절에 휩쓸렸던 게 아닐까 싶은, 이상하고 어설프고 미성숙했던 경험. 되돌아보니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아, 괜히 꺼내봤다 이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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