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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27. 2018

마지막 날.

<100일 글쓰기 100/100>

티거는 언니 없이 혼자 먼저 섬에 내려가 있던 한 달여 동안 매일 밤 마신 맥주캔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고 한다. 여럿 쌓다 보면 천장까지 닿았다고. 회사 총무팀에서 빌린 요를 깔면 반 넘게 차는, 환기도 잘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그 깔끔한 분이 대체 어떻게 맥주캔과 지냈는지 모를 일이다. 기분이 좋아서 커다란 얼음 한 조각을 넣은 컵에 맥주를 따라 마시다 문득, 아주 문득 그 생각이 났다.


남북정상회담이 아주아주아주 오랜만에 열렸고, 속도로만 치면 거의 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모든 게 일사천리로 가고 있는 듯하다. 종전 협정을 맺을 수도 있다는 소문에 ‘에이, 벌써 그게 되겠어?’라고 생각을 하며 통일되면 신의주가 기후가 괜찮다는데 거기 집을 마련해볼까 이런 농담 따먹기를 했다. 그러다 주간 회의 끝물에 누군가 “종전, 기사 떴어!”라고 외쳤다. Daum 첫 화면에 뜬 뉴스 5개에 전부 빨간 ‘속보’ 딱지가 붙어있었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고 붕 뜬 기분이었다.

점심때만도 회사 건물 1층 평양냉면집에 줄이 그렇게 긴 것을 처음 봐서 놀라웠다. 평양냉면-하면 꼽히는 곳 중 하나인 ‘을밀대’에서 오늘자 냉면에 파란색 한반도가 박힌 작은 플래그를 꽂아준 사진을 봤다. 출근하자마자 여기저기 자리에서 남과 북의 원수들이 손을 맞잡고 경계선을 넘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따뜻한 라떼 한 잔을 뽑아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나도 같이 뉴스를 봤다.

기분이 좋은 날이다. 무엇이든 섭섭지 않게 여길 수 있을 만큼 들뜨고 마음에 여유가 있었다. 룰루랄라 퇴근을 해서는 여전히 붕 뜬 기분으로 맥주를 따라놓고 짐을 싼다고 두 시간가량 집 안을 이리저리 오가며 한 모금씩 홀짝거렸다. 오늘 얼굴 볼 일이 없었던 애인도 울컥 눈물이 날 뻔했다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마 4일간의 여행 내도록 그는 틈틈이 그 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숙소 TV에서 나오는 일어를 하나도 알아듣지 못해도 한반도 정세에 대해 다루는 뉴스 꼭지를 보면 히히 웃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으로는 ‘100일 글쓰기’의 마지막 100일째를 생각하며 랩톱 앞에 앉으니 마음 한구석이 허하다. 잘 쓰든 못 쓰든 내 글의 고정 독자가 돼주었던 애인은 매일 읽을거리가 있으니 좋다고 했었고, 나 때문에 브런치 앱을 깔아 새 글 알림을 받아봐 주는 제이미가 있었으며, 어쩐지 관음 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는 구 오빠가 있고, 아주 드물게 지나가는 행인 인척 댓글을 달았던 전 애인도 있었고, 틈틈이 시간 내고 마음 써서 읽고 말을 걸어주던 글쓰기 크루들이 있었다.

100일의 시간 동안 뭐라도 쓰는 데에 급급해서 크루들의 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다음 기수 시작 전까지 한 달여의 시간이 주어질 것 같다. 아마 그동안은 이 헛헛한 마음을 뒷북처럼 그들의 100일간의 기록을 읽어가며 보내지 않을까.

100일. 약 세 달 반. 1분기가 조금 넘는 시간.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더없이 짧다고도 할 수 있을. 와, 눈물 날 거 같아.


100일간 함께 해준 크루들 모두 감사합니다. 덕분에 100일 완성! 할 수 있었어요. 부디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아, 그때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 하고 스스로를 기특해할 수 있는 기억이길 바래요. 가끔은 뭐라도 쓰고 싶다-라고 생각이 들기도 했으면 좋겠네요. 오글거려도, 어쩔 수 없이 내 글을 가장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나에게 가장 익숙할 미래의 나일 거라고 믿거든요. (저의 경험상으로는?) 아무튼, 100일간 함께 걸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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