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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20. 2019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한창 빠졌던 드라마가 <미생>이다. 드라마 속 '장그래'가 겪은 우여곡절과 성장 서사에 제대로 홀렸다. 캐릭터뿐만 아니라 출연 배우들의 매력에까지 빠져서 거의 2년간은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쭉 훑느라 정신없었다.

그리고 다시 지금- 최근 조직에 속하여 일하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서 또 한 번 <미생>을 정주행 하기 시작했다.

스물여섯에 원인터내셔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장그래는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선발되기 위해 바둑을 공부했다. 수많은 기보를 연구하고, 자신의 바둑을 복기하고 기록하고 반성하면서 스스로를 다졌다. 그 과정에서 몸에 익은 방법론을 업무에도 적용하는 모습이 드라마 초반에 몇 차례 비친다. 하지만 효율적인 방식으로 폴더를 정리했더니 왜 가이드에 따르지 않았냐고 한 소리를 듣는다. 업계에서 통용되는 전문 용어를 이해하지도 구사하지도 못하니 무역용어 사전을 외우는 것부터가 숙제다. 장그래의 입사 동기 장백기도 마찬가지다. 이제 사수가 믿고 일을 맡기나 싶었는데, 나름 자신 있게 해서 결재 올렸더니 가이드에 맞지 않는다고 반려당한다. 안 풀리는 문제의 실마리를 얻기 위해 장그래의 제안대로 재무팀장에서 바로 달려간 안영이는 절차를 무시했다고 바로 쫓겨난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회사 내의 누가 봐도 바로 이해할 수 있도록 약속된 가이드를 따라야 한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해진 절차를 거쳐 검토하고 리스크를 줄이는 작업을 한다.


기획자는 일의 시작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과정을 챙긴다. 전략을 세우고 기획안을 작성하면서 다른 기획자, 리더들의 의견을 구하고 디벨롭한다. 필요한 스펙과 정책에 대해 개발자와 함께 검토하고, 와이어프레임을 준비해 디자이너와 함께 화면, 동선 설계를 고민한다. 시안을 디벨롭하고 프로덕트 개발 진행 중간중간에도 수시로 진행 상황을 챙기고, 오픈 전략에 대해 제휴 담당자들과 상의한다. 배포 후에 들어오는 CS를 처리하고 취합하는 과정에서 고객 커뮤니케이션 담당 부서와 정보를 공유하고 서비스 약관이나 법률에 위배되는 콘텐츠, 유저에 대해 관련 모니터링 부서와 확인하여 처리한다. 오롯이 혼자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생> 속 원인터내셔널과 마찬가지로 협업하는 사람들과 사전에 약속하는 업무 프로세스와 공통의 언어, 주 사용 툴, 문서 가이드 같은 게 자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굳이 선언하거나 정의하지 않아도 일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의 틀이 자연히 생겼다.

새로운 팀원이 오면 제일 먼저 묻는 것이 "이 팀은 일할 때 주로 뭐 써요?" 다.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아지트와 메신저, 기획안은 키노트, 시나리오는 스케치에서 화면과 동선을 구상하고 위키 페이지에 설명을 작성한 테이블과 함께 첨부한다. 개발 업무 요청과 QA는 지라, 처리 상태 업데이트 알림은 메신저로 받아서 실시간으로 확인한다. 유관부서에는 아지트로 오픈 소식을 공유한다.

생각나는 대로 두서없이 적어도 이 정도가 우리 서비스 담당자들과 '경험상 약속된 것과 다름없는' 함께 일하는 방식이다.

최근 개발 조직이 개편되면서 큰 단위의 일하는 방식에 맞춰 지라 내용을 모두 업데이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새로운 지라 이슈를 등록할 때는 나 또한 그 포맷에 맞춰 컴포넌트를 채워 넣는다.


혼자 하는 일, 함께 하는 일에 대해 생각을 흘리다 보니 오늘의 대화가 생각난다.

메릴이 "쓰는 언어를 맞춰야 할 것 같아요. 에디터 아래 바를 뭐라고 부르세요?"라고 질문했다.

"전 하단 툴바, 펼쳐진 부분은 팔레트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럼 저도 팔레트라고 부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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