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방학
아이들 방학이 시작되고 지옥문이 열렸다.
순회공연하듯 집안 곳곳을 돌며 머리카락을 줍고 잔소리를 한다.
먼지를 쓸며 잔소리를 한다.
설거지를 하며 잔소리를 한다.
세탁기를 돌리며 잔소리를 한다.
밥상을 차리며 잔소리를 한다.
잠자리에 들며 양치질 하라고 마지막 잔소리를 한다.
집 안에서 맴맴 돌며 잔소리를 하다 머리가 돌 판이다.
아이들에게도 방학이 천국일리 없다.
학교에 안 가도 학원은 가니까.
학원은 학교도 안 내주는 숙제를 산더미처럼 쌓아준다.
피난처는 집 뿐인데, 그곳엔 흉포한 잔소리 마녀가 산다.
내 인생도, 아이들 인생도 기구하긴 마찬가지다.
- 지구 가열화
폭염이다. 그나마 몇 걸음 걷는 게 운동의 전부인데 그마저도 끊겼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말라 비틀어질 것 같은 열기에 걷기를 포기했다.
가는 곳이라곤 주방, 화장실, 침대 위.
다시 주방, 화장실, 거실 바닥.
잠깐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나갔다 우사인 볼트처럼 컴백.
하루 중 에너지를 가장 많이 쓰는 순간이다.
걷지 못하니 뱃살이 는다.
아이들와 붙어 있으니 잔소리가 는다.
뭐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게 없으니 흰머리가 는다.
가속 노화가 초가속 노화로 업그레이드된다.
- 내 마음
방학이 시작됐을 뿐인데 마음 속 분노가 이글거린다.
숙제를 미뤄놓고 빈둥대는 딸이,
숙제를 쌓아놓고 유튜브만 보는 아들이,
호수같은 내 마음에 핵폭탄을 백 만개씩 투하한다.
퇴근한 남편이 저녁 식사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록 지박령처럼 앉아 술을 마신다.
핵폭탄 백 만개가 추가된다.
다들 꼴도 보기 싫다.
빈둥댄다고, 유튜브만 본다고, 술 좀 그만마시라고
돌아가며 잔소리를 퍼부어대는 내가 그 중에서 가장 싫다.
- 셀프디스
나는 도대체 왜, 이러고 사는가.
내가 꿈꾸는 삶은 이것과는 한참 거리가 먼데.
꿈일까.
아니다.
저주일까.
맞을수도 있다.
내 잘못인가.
매우 높은 비중으로 그렇다.
현재 내 모습은 내가 했던 모든 선택의 총합이니까.
아이들이 어렸을 땐 그저 잘 키우는 게 목적이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잘 자랐을까.
적어도 문제가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나는 만족하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아니다.
엄마로서 아이들이 자기주도적 학습 습관을 가진 목표지향적 학생이 되길 바랐다.
전교 1등도 해보고 어딜가나 "쟤 좀 한다"는 소리는 들었으면 했다.
내 욕심이었고 허황된 꿈이었다는 걸, 이젠 인정한다.
우리 아이들은 기질적으로 성취지향적 인물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가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존재가 아닌데도,
노력이란 걸 하면 될 줄 알았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젠 인정한다.
나는 틀렸다.
아이들은 잘 웃고 적극적이며 어른들께 예의바르고 건강하다.
하지만 둘 다 학문엔 큰 뜻이 없다.
아이들이 학문적으로 뛰어난 성취를 거두길 바랐지만
사실 나는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아이들의 싹수는 '그린 라이트'는 아니었다는 걸.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더 미친듯이 노력했던 이유가.
- 잔소리중독증
이제 아이들은 더 이상 내 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내 지시보다 제 마음에 따라 행동한다.
이제 그들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해야 하는 나이가 됐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한다.
문제라면 관성에 법칙에 따라 자동 발사되는 잔소리가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것.
십 년 넘게 달고 산 잔소리를 하루 아침에 뚝 떼어낼 수는 없는 노릇아닌가.
수 많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가족의 안녕과 나 자신의 평화를 위해 침묵하기로 결심했다.
맞다. 나는 심각한 '잔소리중독증'이다.
잔소리를 하지 않으면 불안해 미쳐버리는 상태에 빠진다.
내 불안과 초조함을 낮추기 위해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고 있었던 것이다.
알콜중독자처럼 잔소리를 하지 않고는 하루도 버틸 수 없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이들이 머리가 크고 나니 나의 잔소리가 강력한 마찰과 파열음을 빚어내기 시작했다.
분명 문제가 있다. 이건 건강한 가정의 모습이 아니다.
잔소리가 하고 싶을 때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돌아서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묵언수행 1일차.
어제는 반찬을 해놓고 아예 네 시간 동안 집을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적어도 그 시간만큼은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붓지 않을테니까.
집에 돌아와서도 내 짐을 챙겨 안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나는 떡을 썰테니 너는 글을 쓰거라, 했던
한석봉 어머니처럼 나는 내 일을 할테니, 너희도 너희 일을 하라는 간단 명료한 지시와 함께.
잠자리에 들 땐 마음이 평온했다.
평소보다 잔소리를 덜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에 큰 위안이 됐다.
나는 앞으로 한 달 간 묵언수행 일지를 쓸 것이다.
내 마음에, 아이들에게, 우리 가정에 어떤 변화가 찾아올지
나 역시 매우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