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소설) 당신에게 가는 길

by 지혜

가을이 깊어 가는 아침입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관악산에 낮게 내려온 구름 무리가 산자락을 휘감고 능선으로 짙은 운무가 흐릅니다. 구름과 안개가 바다를 이루는 듯 신비로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난 오늘도 출근길 남부순환로의 정체 길을 헤칩니다.


오늘같이 안개가 풍만하게 산을 덮는 날일수록 오래전 당신과 함께 보았든 소양호가 그립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춘천, 뭇 연인이 그러하듯 우리도 부풀어 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이른 아침 경춘선에 오르곤 했었지요. 아련한 기억 속이지만 만추의 풍경과 넓은 호수를 가득 메우던 물안개를, 오봉산과 청평사의 아리따운 자태를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해가 중천에 뜰 무렵이면 행여나 사라질까, 유람선을 타고 우린 단 몇 초의 시간도 절절하게 아쉬워하며 아스라한 그림자를 쫓아가곤 했었지요. 가슴속까지 파고들던 안개빛 속에서 우린 먼 미래의 꿈을 속삭이며 희망에 부푼 날들이 울울창창 이어질 거라 여겼지요. 언제까지나 곁에서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당신이, 그토록 허망하게 가실 줄은 정녕 알지 못했지요. 오늘이 스무 번째 기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언제부턴가 마음속에 기억의 잔상으로만 남은 당신이 오늘따라 유독 그리운 건 멀리 보이는 산의 안개 때문만은 아니겠지요.


양구 최전방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학교에 돌아온 당신은 남자답고 늠름했습니다.


나와 같이 여린 가슴을 지닌 여인이 빠져들기에 적당하리만큼 푸근하고 너른 가슴을 가진 당신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그저 편안한 당신의 곁에 머무는 게 좋았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와 살결이 좋았고, 당신의 터치는 날마다 새로웠으며, 무엇보다 당신과 함께하는 순간 하나하나가 소중했습니다.


경복궁으로 졸업사진을 찍으러 간 날이었습니다. 졸업반이던 그 해는 로또 광풍이 한반도를 강타했던 2003년이었습니다. 경기침체로 빚어진 실업자가 이십만 명이 넘어서던 해에 어디 마음 둘 데 없는 사람들의 관심과 흥미는 로또와 복권에만 있는 듯했습니다. 분명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시절에 당신과 나는 취업에 대한 불안감을 차마 말로는 하지 못하고 안으로, 안으로만 삭히며 졸업사진을 찍었지요.


로또와 복권 같은 것에 우린 애초에 기대를 걸지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과 나 모두 적당한 시기에 적당한 직장을 찾아, 취업에 성공하여 마침내 틀고 들 둥지를 찾기를, 그저 소박한 시민으로 살아가길 꿈꾸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당신과 내가 함께할 수만 있다면, 우리에게 그보다 소중한 것은 없었습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당신과 나는 손을 맞잡고 경복궁의 자경전 앞을 거닐었지요.


막 새로 산 양복을 차려입은 당신과 단아하게 머리를 올려묶은 나를 향해 학우들은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아, 천생연분이야, 하면서 놀려대곤 했지요. 언제나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던 우리가 동문수학한 학생 중 가장 먼저 결혼식장에 들어갈 거란 사실을 동기들은 철벽같이 믿었지요.


영문과와 중문과를 복수 전공한 우리는 다행히 취업 운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졸업사진을 찍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당신보다 먼저 종로에 있는 모 그룹 계열사의 마케팅부에 입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가 직장을 찾은 지 바로 며칠 후에 당신도 강남에 있는 중국계 기업인 **홀딩스에 입사하게 되었지요. 아직 졸업장을 받으려면 서너 달은 남은 시점, 그것도 모두가 불경기라고 하는 시기에 이루어낸 취업에 우린 더욱 동기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았었지요.


탄소섬유 마케팅부에 입사한 나는 밤 열 시가 되기 전에 퇴근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지하철의 막차를 타고 가는 날도 수두룩했습니다. 토요일엔 오전 근무를 하게 되어 있었으나 나는 늘 오후 서너 시를 넘겨 퇴근했습니다. 업무 일정이 가혹한 건 중국계 기업에 다니는 당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취업전선에 뛰어들자마자 살인적인 스케쥴에 갇힌 우리는 학부 생활 이후 처음으로 떨어져 지냈습니다. 당신을 날마다 볼 수 없는 게 아쉬웠으나 그래도 각자에게 할 일이 있다는 사실에 우린 감사했습니다.


입사한 지 한 달쯤 지난 어느 토요일 오후였습니다. 퇴근 시간에 맞춰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2003년도의 종로3가에선 90년대 히트곡인 남성 듀오 오월의 ‘종로에서’가 흘러나왔습니다. 당신은 내 손목을 잡고 인사동의 한 주점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후 4시밖에 안 됐는데 다자고짜 매실주에 김치전을 시킨 당신은 일단 한잔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묵직한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라 보이기는 했으나 나 또한 한 주간에 쌓인 피로가 상당했으므로 우린 말없이 매실주를 연달아 석 잔을 들이켰습니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 당신이 말했습니다.


“민재야, 나 상해로 파견근무 나간다. 한 6개월 있다가 들어올 거야.”


나는 그때야 비로소 당신이 중국계 기업에 취직한 게 실감이 되었습니다.


“아, 그래? 축하해. 그럼 6개월 동안 우린 못 보는 거야?”


“일 년도 아니고 겨우 반년인데 뭘. 파견이라기보단 신입사원 해외연수의 개념으로 가는 거라 이번 기회에 일을 많이 배우고 들어올 것 같아. 잘 다녀올게.”


당신은 평일인 수요일 오전에 출국했습니다. 신입사원인 나는 눈치가 보여서 차마 회사에 휴가를 내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한 난 동료들이 한잔하자는 것도 뿌리치고 홀로 젊음의 거리를 걸었습니다. 멀리서 명동 성당의 종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습니다. 갑자기 일기예보에도 없던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간간이 흩날리던 눈발은 점점 더 짙어져 함박눈이 되어 쌓여갔습니다. 눈을 자박자박 밟는 발끝에서 당신의 그림자가 다가와 비쳤습니다.


어느덧 당신이 상해로 떠난 지도 두어 달이 지나 대망의 졸업식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졸업식에 가기 위해 회사에 휴가를 내지 않았습니다. 학교에는 늘 당신과 함께 다녔었는데, 혼자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던 나는 회사에 출근하여 묵묵히 일만 했습니다. 대신 당신과 나의 졸업장과 우수 학생 표창장은 며칠 후 조교를 했던 친구에게서 전달받았습니다.


겨울의 끝물에서, 나는 작고 여린 풀잎들을 보았습니다. 초겨울에 떠났든 당신이 반년 후에 오신다고 했으니, 이 여린 풀잎들이 커다랗게 자라있을 때쯤이면 당신이 돌아올 것이었습니다. 오밀조밀 소담하게 자란 풀잎을 바라보던 난 잠시 얕은 선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아주 크고 싱싱한 풀잎들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커다란 풀잎 사이로 오이와 가지, 당근과 토마토 같은 채소도 열리고, 참외와 포도 같은 탐스러운 과일도 주렁주렁 열렸습니다. 채소와 과일은 하나하나 싱싱하고 먹음직스러웠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기분이 몹시도 좋았습니다.


당신의 부고를 받은 건 내가 경남 진주로 출장을 가 있던 때였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정신없이 제품에 대한 브리핑을 마치고 나오는데 평소 친하게 지내던 당신의 누님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습니다. 누님에게 당신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너무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물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나갔던 당신이 하얀 가루가 되어 돌아왔다고 하는 누님은 울먹이고 계셨습니다. 당신 아버님과 누님께서 교통사고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장 상해로 달려가셨다고, 두 분은 길을 건너다 덤프트럭에 치여 즉사한 시신을 현지에서 화장 후 유골함을 갖고 왔다고 했습니다.


누님께서 연락을 취한 건 당신의 뼛가루가 든 유골함이 장례식장에 도착할 무렵이었습니다. 누님께선 거대한 화물차의 바퀴에 깔려 뭉개진 시신을 수습하고 화장하느라 더 일찍 연락할 만한 경황이 없었다고,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나는 당신의 어머니를 처음 보았습니다. 듣던 대로 어머니는 두 분이셨습니다. 낳아준 어머니와 키워준 어머니. 키운 어머니가 정실이었고 낳은 어머니가 후실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정실부인의 미모는 상당히 수려했습니다. 큰어머니가 내리 딸만 셋을 낳으니 보다 못한 당신의 할아버지가 강제로 후실을 들게 했다고, 그렇게 태어난 아이가 당신이라 했지요. 어딘가 슬픔을 간직한 사람답게 당신은 투명한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곤 했지요. 당신은 낳아준 어머니를 작은엄마라 불렀고 키워준 어머니를 큰엄마라 불렀습니다. 그게 집안 규칙이라 그래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가정사가 복잡해 보였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겨우 일어나셨다는, 중풍을 앓고 계신 당신의 작은어머님은 조금만 무리하면 곧 쓰러질 듯이 매우 쇠약해 보였습니다. 당신의 유골 앞에서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해 몸부림치면서 내 아들 살려내라며 울부짖는 모습이 안타까웠습니다. 조문객들은 앞길 창창한 청년의 영정사진과 오열하는 어머님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습니다. 당신의 큰어머니는 그래도 키운 정이 있을 터인데 억지로 눈물은 나지 않는지 한쪽 구석에서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었습니다.


손님 중엔 어쩜 아들이 죽었는데 울지도 않냐고 하는 분도 더러 있었습니다.


장지에서 일꾼들이 파놓은 땅에 당신의 아버지가 유골함을 묻으려던 찰나였습니다.


이제 여섯 살 난 당신의 조카가 뒤에서 천진난만한 소리로 외쳤습니다.


“삼춘 어딨어? 저 속에 있어?”


아이의 물음에 나는 비로소 당신의 부재가 온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꾹 다물고 있던 잇새로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내가 울기 시작하니까 유가족들이 모두 함께 따라서 울었습니다. 남녀 할 것 없이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래도 당신의 큰어머니는 마지막까지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아 안타까웠습니다.

참 지독한 사람이란 생각을 나만 했던 건 분명 아니었을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 위에서 삶은 물 흐르듯 흘러가더군요. 당신을 떠나보내고 오 년 만에 새 인연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아들과 딸도 낳았습니다. 가정이란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남편과 아이들은 사랑의 원천이자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한 회사에서 20년을 근속한 덕분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나는 곧 임원이 되기 위한 승진 심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곧 인사위원회가 열리는데 심히 떨리고 긴장됩니다.


세상이 변했다고 해도 한국 사회는 아직 변하는 세태를 온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유리천장 다음에 유리 절벽이란 말이 있듯, 진급과 동시에 난제가 가득한 업무를 도맡아 어려움을 겪고, 결국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여성 임원을 심심치 않게 보았습니다. 불합리한 상황이 여성 리더에게 집중되는 한국 사회 문제가 언제쯤 해결될지 알 수 없습니다. 경기침체가 시작되어 경영난을 겪는 회사에서, 온전히 설 자리가 있을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유리 절벽 아래로 미끄러질 자신도, 유리천장을 뚫을 자신도 없습니다. 요즈음 나는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입니다. 이런 때에 당신이 곁에 있었더라면 하고 괜한 상상을 해봅니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분주한 가운데서도 이따금 나는 당신의 기일이면 추모 공원에 들렀습니다. 해마다 들르진 못했어도 당신의 기일을 잊어버린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남편이 모르게 당신에게 가면서도 딱히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습니다. 꼭 그래야만 하는가, 산 사람이 죽은 사람 기념하러 가는 게 꼭 죄가 될 일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남편이 알면 길길이 날뛸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오늘은 평소보다 엄숙하고 차분하게 하루를 보내려 노력했습니다. 당신의 기일마다 늘 그랬습니다. 정오를 지나서 시곗바늘은 어느덧 오후 두 시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나는 볕이 따뜻한 창가에 가만히 다가섰습니다. 가을 햇볕이 들어찬 창가에 당신의 환한 얼굴이 비칩니다. 환영인 듯 환상인 듯 그렇게 스쳐 가는 당신의 그림자에 난 심장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설렙니다. 쏟아지는 햇살에 빨려 들어갈 듯 그렇게 창가에 서서 당신을 떠올리던 난 결국 집안일을 핑계로 조기 퇴근을 하고 말았습니다. 엔진을 켜고 가속페달을 밟는 기분이 상쾌합니다. 이렇게 가끔이나마 잊지 않고 당신에게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차창에 당신의 엷은 미소가 비칩니다. 안개와 구름이 걷힌 관악산의 울긋불긋한 단풍에 당신의 얼굴이 걸리었습니다. 자동차는 미끄러지듯 고속도로를 달려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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