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나 눈을 떴을 때 내 앞을 가로막는 하얀 막을 보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껌벅거리던 나는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입속에 난 조그만 카벙클로 하얀 막을 톡톡, 하고 두드렸어요. 몇 번을 두드리고 쪼아댔더니 어느새 하얀 막이 빠그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어요.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오자 사방으로 부지런히 팔다리를 움직거리는 형제들이 보였어요. 한 둥지에서 백 명도 넘는 형제들을 만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서로 가까이에 있는 형제와 눈빛을 교환했지요. 천장을 올려다봤으나 빛도 들어오지 않고 사위는 어두컴컴했어요. 난 그때야 우리 형제들이 오랜 시간 구덩이 속에 묻혀 있었다는 걸 알았죠. 누군가 천장을 막고 있는 지붕을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두 팔을 저어가며 모래를 헤치더군요. 우린 함께 힘을 합쳐 모래 지붕을 뚫기 시작했어요. 중간에 깨어난 형제는 사방의 모래 벽을 허물고 둥지 맨 아래에 있는 형제들은 공중에서 떨어지는 흙을 팔다리로 밟고 다졌습니다. 곧이어 형제가 숨어있던 둥지를 굳건히 지켜준 지붕이 점점 얇아지는 게 느껴졌어요.
으쌰으쌰, 우린 모래 천장이 뚫릴 때까지 서로를 격려하며 응원했어요. 어느 틈엔가, 공중에서 희미하게 붉은빛이 쏟아져 들어왔어요. 그리 환하지도, 어둡지도 않은 빛이 어두운 구덩이를 밝혀주었어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구덩이 속을 파고들었어요. 비릿한 내음이 언젠가 엄마 뱃속에서 맡던 바다 향이란 걸 알았지요.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우린 모두 가슴이 설레었어요.
맨 먼저 지붕을 뚫은 맏형이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어요. 전진, 또 전진하라. 하나도 빠짐없이 바닷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합심하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어요. 높이,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고, 어서 어서 구덩이에서 빠져나와 저 넓은 해변으로 나가야 한다고, 선두에 선 누나가 큰 소리로 외치며 형제들을 독려했어요. 우리는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경사진 모래 언덕을 올라, 드디어 편평하고 너른 해변으로 나왔어요.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콧등을 스치는 게 짜릿했어요. 숨이 매우 차, 난 잠시 쉬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어요. 해변 곳곳엔 은은하게 붉은 등이 켜져 있었고요, 하늘엔 새벽 별이 희미하게 반짝이더군요. 하늘에 점점이 박힌 별들 한가운데 동그마니 달이 떠 있었어요. 둥근 쟁반을 정확히 반으로 가른 듯이, 왼쪽으로 환하게 밝은 빛을 본 순간에, 나는 직관적으로 깨달았어요. 저 빛은 내가 따라가야 할 빛이라는 걸,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는 걸. 와, 정말 아름답지 않아?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어요. 그들은 모두 손목에 푸른색 밴드를 차고 있었고요, 손에는 저마다 네모난 카메라를 들고 있었어요. 어떤 이는 기다란 막대기에 네모난 카메라를 끼워놓고 형제들에게 가까이 다가갔어요.
난 그들이 똑같은 의미의 말을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한다는 걸 느낌으로 알았어요.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들의 얼굴색과 생김새가 조금씩 달랐지만, 작고 연약한데다 시꺼멓고 볼품없는 우리에게 아름답다고 말해 주어 기분 좋았어요. 카메라를 든 이들을 구경하느라 한눈파는 사이, 옆구리에 쌩하고 바람이 불었어요. 고개를 돌려 옆을 본 순간,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지요. 조금 전까지 내 옆에서 함께 쉬던 형제의 몸이 커다란 갈매기의 부리에 물려있는 것 아니겠어요. 갈매기는 형제의 몸을 아그작 빠그작 부서뜨렸어요. 갈매기가 꿀떡꿀떡하고 형제의 몸을 삼키는 소리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어요. 형제의 몸이 갈매기의 목울대를 타고 넘어가는 걸 차마 볼 수 없어 그만 눈을 감아버렸어요.
그때, 앞서가던 누나가 소리쳤어요. 어서 앞을 보고 달리지 않고 뭐해? 너도 갈매기의 먹이가 되고 싶어? 누나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공중을 올려봤어요. 수십 마리의 바닷새가 공중을 빙글빙글 돌며 형제들을 노려보았어요.
숲 저편에선 코요테 한 마리가 해변을 향해 성큼성큼 걷고 있었어요. 육지 동물과 바닷새 할 것 없이 동물들은 축제라도 벌어진 양, 어떤 놈을 골라 먹어야 할까를 궁리하며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었어요. 난 죽기를 각오하고 달리기 시작했죠. 숨이 차도 쉬어선 안 되겠구나. 한눈팔다간 바닷물에 몸을 적셔보기도 전에 갈매기나 까마귀의 밥이 되고 말겠는 걸. 난 전속력으로 앞만 보고 달려가기 시작했어요. 바다를 향한 전진이기도, 천적을 쫓으며 나가는 돌진이기도 했죠. 눈앞에선 바람이 볼을 스치는 간격으로 까마귀들이 형제를 물어갔어요. 눈물을 흘릴 새도 없이 나는 전력 질주하기만 했어요.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요. 허기지고 목이 말랐으나 그럴수록 더 정신을 가다듬었어요. 죽지 않고 살아남아야 해, 반드시 살아남아서 먼저 간 형제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내야 해, 조금만 참으면 바닷물에 목을 적실 수도 있고, 플랑크톤으로 배를 채울 수도 있어, 스스로 격려하며 달려 나갔지요. 가슴이 조여들듯 숨이 차서 연신 헉헉거렸어요. 하지만 배와 가슴에 닿는 모래흙의 촉감은 따뜻하면서 부드러웠어요. 바다 내음을 흠뻑 머금어 촉촉하기도 했고요. 모래밭을 기어가는 동안 모래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어요. 알싸하고도 구수한 흙내가 콧속으로 파고들었어요. 모래의 고운 입자와 촉감과 향기를 전신에 퍼진 감각으로 음미했어요. 정신없이 모래밭을 기어가노라니 해변 여기저기 파헤쳐진 수천 개의 둥지가 눈에 띄었어요. 제각기 다른 어미에게서 난 형제들이 둥지를 빠져나와 해변으로 나왔어요.어떤 형제는 편평한 땅에 팔을 뻗기도 전에 소리 한번 내지르지 못하고 독수리에게 먹혀버렸어요. 쏜살같이 날아온 독수리가 형제의 몸을 낚아채는 것을 보며 나는 질겁하고 달렸어요.
해변 곳곳에서 형제들의 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어요. 어디선가 큰소리가 나면서 온몸이 떨릴만한 진동이 울렸어요. 커다란 나무 막대기가 퍽하고 땅을 치는 것과 동시에 검은 독수리 한 마리가 공중을 향해 날아올랐어요. 코요테 한 마리가 막대기의 진동을 피해 달아났어요. 막대기가 땅을 내리찍는 소리도, 독수리가 날개를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코요테가 뛰어가는 소리도 아주 크게 들리더군요. 주위를 둘러보니 해변 한가운데서 누군가 기다란 막대기를 들고선 공중을 나는 새들과 육지 동물을 쫓고 있지 않겠어요? 그분은 연신 허공에 막대기를 휘저었어요. 덩치가 크고 푸른 눈망울을 가진 그 분이 아니었다면 수백 명의 형제는 벌써 독수리와 코요테의 밥이 되었을 테죠. 각자 갈 길이 바빠 내색하지 못했으나 형제가 무사히 바다에 도착할 수 있게 돕는 그분께 우린 한마음으로 감사의 눈빛을 보냈지요. 해변은 고르지 않고 울퉁불퉁하더군요. 얕은 웅덩이와 구릉을 수십 번도 넘게 넘어 다녔더니 탈진할 듯이 목이 말랐어요. 물 한 모금이 간절하게 생각나면서 현기증이 나더군요. 에너지가 고갈된 듯, 내 몸에서 서서히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어요.웅덩이에서 구릉으로 올라가던 찰나, 어디선가 굴러온 나뭇잎 위에 내 몸이 얹히고 말았어요. 나뭇잎은 생각보다 미끄러웠어요. 나는 이리저리 몸을 버둥거리며 나뭇잎을 피해 보려 했지요. 그러다 그만 눈 깜짝할 사이, 웅덩이 아래로 미끄러지며 내 몸이 벌러덩 뒤집히고 말았어요. 나 좀 살려줘요! 게, 아무도 없어요?
나는 등딱지를 모래에 대고 하늘을 보고 누운 채 팔다리를 버둥거렸어요. 하지만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 않고 모두 저의 갈 길만 바삐 가더군요. 하지만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어요. 조금만 한눈팔면 바닷새의 먹이가 되는 현장을 눈앞에서 여러 차례 목격했으니까요. 한 소년이 가까이서 나를 지켜보았어요. 조금 전 둥지에서 빠져나올 때 보았던 이들 중 하나였어요. 소년은 나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입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구경만 하더라고요. 나 좀 도와줘, 아무리 말해도 소년은 알아듣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그저 지켜보기만 하더라고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팔다리를 움직였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 없으니까요. 한번 뒤집힌 몸은 좀처럼 바로 돌려지지 않더라고요. 무서움이 나를 엄습했어요. 이러다 꼼짝없이 갈매기 밥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옆구리에 바람이 불었어요. 고개를 돌리는 찰나, 난 그만 또 못 볼 꼴을 보고 말았어요. 어디선가 나타난 이구아나가 형제 한 명을 날름 물어가지 않겠어요? 해변 저편으로 보이는 풀숲의 나뭇잎처럼 짙은 초록빛의 이구아나는 아름답고도 매혹적인 몸매를 갖고 있었어요. 유연하고 매끄럽게 빠진 몸통과 꼬리는 다가가서 만져보고 싶을 정도로 탐스러웠지요. 형제를 잘근잘근 씹어먹는 이구아나의 눈빛은 선량하기 그지없었어요. 저런 눈빛을 하고도 연약한 미물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낚아채다니, 가슴속에서 울화가 치밀어오르는 걸 간신히 진정시키며 나는 이번에도 눈을 질끈 감고 말았어요. 형제가 하나둘씩 사라지는 걸 지켜보노라니 가슴 한가득 허무함이 밀려왔어요. 상실감이라고도 해야 할까요. 난 다시금 몸을 움직거렸어요. 이쪽저쪽으로 아무리 버둥거려보아도 뒤집힌 몸이 바로 돌려지지 않았어요. 그때 지나가던 형제 하나가 내게 소리쳤어요. 안 일어나고 뭐 해? 빨리 바다를 향해 나아가야지, 안 그러면 우리 모두 이구아나의 밥이 된다구! 이구아나에게 물려가고 싶지 않으면 어서 빨리 일어나! 형제의 말에 정신이 들었던지 왼쪽 팔다리에 힘을 주고 몸 전체의 힘을 한쪽으로 몰아넣었더니 글쎄 신기하게도 뒤집혔던 몸이 돌려지지 않겠어요? 난 다시금 바다를 향해 전력 질주를 시작했어요. 쏴아, 하는 파도 소리를 어렴풋이 들으면서 말이지요.하지만 바다는 아직도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더군요. 그래도 목적지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죠. 바다는 점점 선명한 실체로 다가오고 있었어요. 푸르른 바닷물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더군요. 철썩, 처얼썩,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나는 점점 빠져들었어요. 그건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파도의 속삭임으로 들렸어요. 얕고도 묵직한 흔들림으로 다가오는, 가장자리에 흰 거품을 말아 해변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볼수록 조그만 가슴이 뻥 하고 뚫리는 게 아주 시원했어요. 거대한 파도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요.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바다로, 바다로 이끌어 주었어요. 우린 모두 같은 마음으로 흥분해서 함성을 질렀어요. 그 순간, 우린 모두 승리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바다를 쟁취한 승리자 말이지요. 와, 바다다! 형제여, 어서 빨리 저 바다로 달려가자. 바다에 닿기만 하면 우리에겐 먹을 것이 생길 거야. 우리가 먹고 마실 것들이 저 바닷속에 무수히 널려 있을 거야. 먹을 것만 있겠니? 자고, 놀고, 즐길 거리가 넘쳐날 거야. 천국이 바로 저 바다라구!
그때 선두에서 달려가던 누나가 형제들에게 외쳤어요. 앞을 보라구, 앞을. 옆도 뒤도 돌아보지 말고 오직 앞을 봐야 해. 한눈팔아선 절대 안 돼. 그리고 하늘을 봐! 저기 저 달빛을 기억해야 해. 달빛을 따라가야 한단 말야.
앞으로 십오 년쯤 후에 우리가 와야 할 도착지는 바로 여기 이곳, 아리바다란 말야. 오늘처럼 왼쪽으로 밝은 달이 반쪽만 남은 날, 우린 바로 이곳에서 만나야 한다구. 잠시 숨을 가다듬느라 바다와 하늘을 번갈아 바라보았어요. 숨이 찰 만도 했지요. 알에서 깨어난 후 쉬지도 않고 여기까지 달려왔잖아요. 오는 길에 바닷새의 밥이 된 수많은 형제를 보았고, 바닷새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쉼 없이 눈동자를 굴렸잖아요. 먼 하늘에서 동이 트고 있어요. 일출이 시작됐는지 수평선에서 붉은빛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바닷물이 점점 붉어지는 게 아득히 보였어요. 하늘엔 반쪽만 남은 달빛이 서서히 구름 저편으로 사라져가고 있었어요. 어느새 파도가 코앞으로 다가왔어요. 파도가 한번 크게 밀려와 나를 쓸어가 주기만 하면 될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난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광활한 바다가 두 팔을 벌려 안아줄 것만 같아 눈물이 날 것만 같았어요. 바다 가까이 해변은 둥지가 있던 곳에 비해 더 촉촉하고 부드럽더군요. 게다가 사람과 짐승의 발자국이 커다랗게 나 있기도 하고요. 나는 마지막 힘을 내서 바다를 향해 다가갔어요. 어쩐지 몸이 자꾸만 흙 속에 빠져들 듯한 게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어요. 잠시 기우뚱하는 찰나,
내 몸이 그만 또 뒤집혀 버리고 말았지요. 아, 정말이지 바다는 멀고도 가까운 곳인가, 난 다시금 필사적으로 팔다리를 버둥거렸지요. 고지가 바로 저 앞이라고, 빨리 일어나야 한다고, 모래밭에서 처음 뒤집혔을 때처럼 한쪽으로 체중을 모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그 찰나에도 여럿의 형제가 갈매기에게 먹히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봐야 했어요. 나는 마음에 깊은 슬픔을 간직한 채 잊지 않기로 했어요. 형제들의 귀한 목숨을 절대 잊지 않기로. 촤르르 흐르듯 다가온 파도의 힘으로 뒤집힌 몸을 바로 돌릴 수 있었어요. 파도가 나를 바닷속으로 데려갔어요.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거대한 파도가 나를 휩쓸고 가는데도 나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어요. 내 몸은 육지에 있을 때와는 비할 수 없이 가벼워졌어요. 바닷속엔 나보다 먼저 온 형제들이 힘차게 팔을 내저으며 광활한 대양으로 나아갔어요. 잘했어, 정말 잘했어, 우린 눈빛으로 서로에게 신호를 보냈어요. 바닷물 속에서 처음으로 나는 뒤를 돌아보았어요. 우리 엄마에게서 난 형제는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어요. 바닷속을 헤엄쳐가는 형제 중에 수컷은 오직 나밖에 없더라고요. 그래도 정말 다행이에요.
언젠가 아리바다를 다시 찾을 수 있을 진 모르겠지만, 나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푸르른 바다를 누비려고요.
공중을 나는 새들이 하늘을 누비는 것처럼, 난 바다를 하늘 삼아 유유히 헤엄쳐가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