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을 맞이해 아들은 조부모 댁에 갔다. 아들의 조부모 댁은 내 전 시부모와 전 배우자가 사는 집이다. 아들은 명절이나 방학이 되면 어김없이 조부모 댁에 다니러 간다. 아들은 그 집에서 빛과 같은 존재다. 장손인 데다 남아 선호가 심한 집에서 아들에게 희망을 품는 건 당연한 일일 거다. 작년부터 그 집에 가도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전부터 쌓인 빚을 못 갚아서 빵에 들어갔다 나왔으나 출소한 지 얼마 안 돼 다시 집을 나갔다고, 몇 달이 지나도 안 온다고, 할머니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고, 할머닌 날마다 아빠 걱정이라 했다. 아빠가 뭔가 다른 잘못을 한 듯하기도 하고, 정선 카지노에도 몇 번 들락거린 것 같다는데 정확히는 모른다고 했다.
오늘은 오전 근무를 마치고 D시에 가야 한다. 내일은 아침부터 KTX를 타고 동대구에 가야 한다. 오늘과 내일은 외근의 연속이다. D시는 내가 J시로 떠나오기 전에 십오 년을 살았던 동네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키웠다.
처음 결혼한 남편은 디벨로퍼, 그러니까 부동산 개발업을 하는 사람 밑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 남편의 수입은 나쁘지 않았다. 돈은 자기가 벌어올 테니 살림이나 하라는 말에 그러면 되는 줄 알았으나 살아보니 그게 아니었다. 처음엔 젊은 사람이 타운하우스에 산다고 동네에서 부러움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우리 집 가세는 기울기 시작했다. 아이가 세 돌을 지날 때부터 남편은 욕심이 많아졌다. 조만간 어디 산자락에 골프장이 들어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는 무리하게 대출받은 돈으로 땅에 투자하더니 결국 쪽박을 찼다. 골프장 계획은 무산되었고, 땅값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투자 수익보다 나가야 할 이잣돈이 더 큰 바람에 남편의 신용은 점점 추락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동산을 다루는 사람이 동종업자에게 사기를 당했다. 강원도 어딘가에 절대 팔리지 않을 듯한 땅과 농막을 산 남편이 말했다.
“살면서 이토록 많은 빚을 져보긴 처음이야.”
나이 서른에 집에서 놀던 난 뭔가 일을 해야 하는데 경단녀가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더구나 다섯 살인 아들을 데리고 생계를 의탁할 일을 찾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하늘이 도왔는지 대학 동창의 권유로 법률사무원 양성학원을 알게 됐다. 국비가 지원되어 수강료가 얼마 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해서 로펌학원 수료증과 법률사무원 자격증을 손에 쥐었다.
우리 가정이 찢어지면서 D시를 떠나온 나는 J시에 정착했다. 급히 이력서를 내고 이직을 준비했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J시 지방법원 앞에 있는 대형 로펌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했다. 시골 동네에서 조그만 법률사무소에 다니다가 대도시에 있는 대형 로펌으로 가는 데 성공하니 자신감이 생겼다. 사람이 자신감이 생기면 자연히 웃음도 많아지는 법이다. 나는 J시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법인에 근무하는 사무장과 결혼하는 데 성공했다.
오랜만에 D시를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곳에 몸담았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난 집에 돌아오자마자 저녁도 대충 때우고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몹시 피곤했다.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그렇게 잠이 나를 빨아들였다.
꿈에서 전남편이 나왔다. 그는 언젠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본 적 있는 몽골의 고비사막 한가운데 퍼질러 앉아 뜨거운 햇볕에 타고 있었다. 그의 앞으론 젊은이들이 모래에서 빨간 썰매를 타고 내려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쌍봉낙타를 타고 지나갔다. 그중 몇은 남루한 차림으로 햇볕을 맞는 남자를 가리키며 저 사람 뭐냐고 했다. 눈빛에 한 줄기 야유가 묻어났다.
못 본 척하고 서둘러 지나치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구 엄마, 하고 부르면서 그는 쉰 목소리를 가르랑거리며 내게 애원했다. 목마르다고, 목이 타서 죽을 것만 같다고, 제발 물 한 모금만 달라는 그를 향해 난 끝내 뒤돌아보지 않았다. 수통을 차고 있었지만 내가 먹을 물밖에 없었고, 누구에게 나눠 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눈을 질끈 감고는 그냥 가려는데 그가 뒤에서 살려달라고, 제발 살려달라면서 쥐어짜는 소리를 했다.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며 잠에서 깼는데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대구 지방검찰청에서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후 내내 형사재판 기록을 복사하고 나왔더니 역시나 오른쪽 검지가 얼얼하다.
아침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역방향이다. 일부러 역방향 좌석을 예매한 건 아닌데 급하게 표를 끊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처음 KTX 역방향 좌석에 앉았을 땐 기차가 거꾸로 달려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데다 약하게 멀미도 했었는데 이젠 적응이 되었다. 나는 좌석에 앉자마자 복사한 기록물을 꺼내어 자료를 훑어보았다. 빠진 게 있는지, 잘못된 건 없는지 검토하다 보니 기차는 어느새 서울에 다다랐다.
KTX에서 내리자마자 지하철로 환승하기 위해 나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사무실에 들러 낮에 복사한 자료를 건네줘야 했다. 금요일, 그것도 휴가철의 서울역은 어딘가로 오고 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종종걸음으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데 군데군데 노숙자들이 누런 상자를 깔고 앉아 바구니를 내밀고 있었다. 바깥 날씨가 너무 더워 노숙자들이 역사 안으로 모여드는지 곳곳에서 쿰쿰하게 냄새가 났다. 나는 그들에게 눈길 주지 않고 잰걸음으로 걸었다. 냄새가 나서라도 빨리 지나가야 했다.
한 노숙자 앞을 지나칠 때였다. 그는 여름인데도 두꺼운 패딩 잠바를 입고 있었다. 신기했다. 덥지 않은가. 아니면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한기를 느끼는 건가. 그의 옆엔 빈 소주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검은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모자 밑으로 드러난 얼굴의 윤곽이 낯설지 않았다. 언제부터 안 씻었는지 얼굴에 때가 끼어 지저분했으나 그는 분명 아이 아버지면서 동시에 친권자였다. 처음 가정이 찢어질 때 중학생이던 아이는 나한테 오지 않고 아버지를 따라갔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들은 전남편과 생긴 것부터 하는 짓까지 모든 게 닮았다. 아무리 빚쟁이들한테 쫓겨도 아들은 아버지가 무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은 언제나 나보다는 아빠와 대화가 통했고 난 그저 잔소리하는 엄마일 뿐이었다. 아이는 한동안 조부모 댁에서 살았는데 아버지 상황이 나빠지면서 그 여파가 조부모한테까지 미쳤는지 어쨌는지 자세한 건 나도 모른다.
내가 지금의 남편과 새 가정을 꾸린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아이는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집에 반찬이 없다고, 어쩔 땐 우유에 밥 말아 먹는다고, 반찬이 없어서 못 살겠다고, 아이는 그렇게 나한테 왔다. 아이가 우리 집에 온 지 얼마 안 된 날에 친구와 통화했는데 친구가 그런 질문을 했다. 집에 온 아들이 침입자는 아니냐고, 침입자. 그 의미에 대해 나는 한동안 생각했다. 침입자가 아니라고도, 맞는 것 같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심정을 차마 친구에게 말하진 않았다.
조부모 댁에 살던 아이를 데려오면서 양육권만 넘겨받았고 친권은 여전히 전남편에게 있었다. 바닥에 상자를 깔고 기둥에 기대앉은 그는 아이에게 전혀 친권을 행사할 수 있을 듯해 보이지 않았다. 열여덟인 아들이 이 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니 친권은 의미 없는 것이라 해도, 한 아이의 아버지가 그러고 앉은 모습에 허탈했다.
나는 그의 앞에 선 채 미라처럼 얼어붙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악취와 술 냄새가 섞여 나는 냄새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색이 된 얼굴로 그의 앞에서 어쩌질 못하고 섰는데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와 난 눈이 마주쳤다. 그는 갑자기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리면서 쭈뼛쭈뼛했다. 손바닥을 마주 잡고 비비면서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다 옆에 있던 분유 깡통을 끌어다 내밀었다. 분유통 안엔 천 원짜리 지폐 두어 장과 동전 몇 개가 들어 있었다. 지금 나더러 돈을 달라는 건가. 기가 막혔다. 나는 돈을 소지하고 있지 않았다. 갖고 있던 현금은 검찰청에서 복사 카드 사는데 다 써버려 지폐 한 장 없었다. 나는 그를 외면했다. 다시 종종걸음으로 앞을 보며 걷는데 멀미가 났다. 한때 지지리 궁상떨던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괴로웠다. 몸에서 힘이 빠졌다. 저 사람에게 한때 인생을 걸고 아이까지 낳았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었다. 저렇게 더러운 사람과 한때는 사랑이니 추억이니 정이니 이런 말로 엮였다는 것도, 그에게 삶의 많은 부분을, 또 에너지를 사용했다는 사실도 치가 떨리게 역겨웠다.
씩씩하게 앞을 보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걷다가 보니 이것은 아니지 싶었다. 눈앞에 스토리웨이 편의점이 보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걸음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데 가슴이 떨렸다. 그건 동정심에서 나오는 떨림이 아니었다. 정녕 허탈한 마음에서 나오는 떨림이었다. 결국 나는 오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인출했다. 주머니에 돈만 넣고 나오려다 뒤를 돌아봤는데 냉장고에 시원한 물이 있었다. 나는 법인카드로 물 한 병을 구매했다. 내가 사 먹은 걸로 회사에 청구할 생각이다.
나는 오던 길을 따라 걸었다. 멀리서 나를 발견한 그가 다시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 죽었소, 하는 심정이 느껴졌다. 그는 간혹 어깨를 들썩이거나 고개를 저었다.
그의 앞에 멈춰 선 나는 슬그머니 생수병을 내려놓았다. 그가 나를 한번 쓱 올려다보더니 다시 고개를 숙였다. 술이 안 깼는지 눈빛이 흐릿하면서 초점이 없었다. 야윈 탓인지 전보다 눈이 커진 듯 보였다. 주머니에서 꺼낸 오만 원을 분유통에 넣으면서 순간 내가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서서 뒤돌아보지 않고 걷는데 심장이 쿵쾅거리면서도 현기증이 났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나는 다짐했다. 오늘 본 일을 기필코, 절대 아들에게 말하지 않기로, 난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무덤까지 가져가기로 맹세했다.
어느덧 무더운 여름도 가고, 가을도 가고, 찬 바람 부는 한겨울이 왔다. 기상캐스터는 올겨울엔 유난히 한파가 심할 거라고 가을부터 얘기했는데 일기예보가 빗나가지 않았다. 12월 초반부터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잦았다. 올해 들어 최저 기온을 기록한 날에 나는 D시로 외근을 나갔다. 지방법원 지원에서 열심히 민사재판에 관한 기록을 등사하고 있는데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그런데 아들이 울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죽었데. 서울역에서 오늘 아침에 얼어 죽었데. 아빠가 죽었는데 할아버지가 시신을 거부했데. 엄마, 아빠는 어떻게 되는 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아들은 말을 더듬거리며 연신 훌쩍였다. 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이에게 일렀다. 할아버지 뜻대로 하게 가만히 있으라고, 아버지는 좋은 데 가실 거라고, 너는 너의 삶을 잘 살면 된다고, 울지 말라고 하면서 끊었다.
고속도로에 올랐는데 퇴근 시간이어서인지 차가 막혔다. 라디오를 틀었다.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가 새삼 궁금했다. 교통방송에서 뉴스가 나왔다. 굵은 목소리의 남성 앵커가 말했다. 연일 계속되는 한파에 오늘 아침에도 서울역에서 동사자가 나왔다고, 아침마다 역무원이 얼어 죽은 시신을 발견한다고, 가족을 찾아서 연락하면 십중팔구 시신 인수를 거부한다고, 그렇게 죽은 시신은 서울시에서 무연고 장례로 처리한다고, 날이 추울수록 사회 취약계층에 있는 이웃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 말하는 앵커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고 사무적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변호사에게 아들의 상속 한정승인에 관한 상담을 요청했다. 전남편의 채무로 인해 내 아들에게 피해가 오는 걸 어떻게든 막고 싶었다. 변호사는 자기 일처럼 세세하게 내 일에 신경을 써주었다.
아들은 한동안 학교에도 가지 않고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학교에 안 가는 아들이 걱정되었으나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엄마와 아들 사이에는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느끼는 순간이었다. 아들은 친아버지를 무척이나 그리워했다. 남편은 아들에게 특별히 위로의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남편은 자기 아이들과 페이스톡 영상 통화를 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습관적으로 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았다.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에는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지상으로 떨어진 눈은 녹지 않고 그대로 쌓였다. 수북수북 쌓인 눈이 누렇게 황톳빛으로 보였다. 언젠가 꿈에서 본 고비사막에 쌓인 모래와 집 앞에 쌓인 눈이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 물을 달라고, 목마르다고 외치는 소리가 눈바람에 날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