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오에 겐자부로의 ‘기묘한 아르바이트’라는 단편소설을 읽었다. 제목 그대로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고기 브로커에게 일당을 떼이고 받지 못한 삶의 비열함을 다룬 소설이었다. 작품에서처럼 살아있는 개 150마리를 죽이는 것만큼이나 잔인한 일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내게도 ‘기묘한 아르바이트’를 해 본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사건 두 개가 있는데, 이 두 사건은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지금에도 잊히지 않고 기억의 테두리를 맴돌다 이따금 눈앞에 생생히 재현된다.
첫 번째는 중학교 3학년, 그러니까 IMF 사태가 발발한 1997년에 있었던 일이다. 친구와 둘이 다리가 부러질 만큼 아프게 족발집의 전단지를 돌리고 시급을 아예 받지 못한 일이 있었다. 하루도 아니고 꼬박 사흘간 뛰어다녔으며 맹세코 우리는 전단을 한 장도 버리거나 훼손하지 않았다. 우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아파트 집집을 일일이 돌며 우유 들어가는 개구멍으로 전단을 집어넣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하나라도 버린 게 발각되면 사흘 치 급여가 통째로 날아갈 줄 알라고 주인이 단단히 일렀기에, 우린 정말 한 장이라도 버리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전단을 돌린 구역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발생하는 주문 건수마다 일정 금액을 더해 보수를 주겠다는 조건에 동의한 건 순전히 잘못이었다. 순진하기도, 순수하기도 했던 열여섯의 친구와 나는 사흘이나 뛰어다닌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정말 주문이 단 한 건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단 걸 생각지 못했다. 또한 그것을 전적으로 사장의 말 하나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과, 그 말에 대해 일을 한 당사자가 참과 거짓을 확인하지 못할 거란 사실에 대해서도 물론 상상하지 못했다.
- 그럼 저흰 돈을 한 푼도 못 받나요?
- 여기, 이거 봐봐. 시킨 게 없잖아. 시켜야 돈을 주지.
사장의 손에 들린 종이에 족발 주문 목록과 배달 주소지가 어지럽게 적혀 있었다. 낙서처럼 지저분했고 글씨도 괴발개발, 지렁이처럼 알아먹기 힘든 글자들이 굴러가는 걸 친구와 난 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사장이 메모지의 뒷장을 넘기니 윗부분에 우리가 작업한 아파트 이름만 있을 뿐 아래는 텅 비어 있었다. 사장은 여백을 친구와 내 얼굴에 번갈아 들이대며 소리쳤다.
- 자, 봐봐. 주문 들어온 게 하나도 없잖아!
무거운 다리를 끌고 가게를 나서는 우리의 뒷모습을 외면한 채 사장은 다시금 칼을 들고 족발을 썰기 시작했다. 비릿하고 담백한 족발 냄새가 가게 밖까지 새어 나왔다. 몹시 배가 고팠으나 우린 족발 한 점 먹어보지 못한 채 그렇게 걸음을 옮겨야 했다. 친구가 먼저 말했다. 할 수 없지 뭐.
아르바이트를 먼저 제안한 건 내 쪽이었으나 친구는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그만 잊어버려,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날 위로했다. 분식집에서 우리는 각자 용돈을 털어 추위를 달래고 허기를 채웠다. 돈을 받으면 무얼 하거나 무엇을 사러 가기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마지막 추억을 쌓으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그때는 그랬다. 일 시키고 돈을 안 줘도 업주가 잡혀가지도, 신고를 당하지도 않았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4년쯤 흐른 2001년 겨울에 일어난 사건이다. 외환위기를 거의 극복해 가던 한국 사회는 활기를 되찾는 듯하면서도 경기 침체가 이어지고 있었다.
집안 사정상 나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대학에 가지 못했다. 대신 하루 두 탕의 알바를 했다. 수능시험이 끝나자마자 쫓기듯 사회로 내몰린 셈이었다. 낮에는 시급 2,500원짜리 돌솥밥 집에서, 저녁엔 그보다 500원을 더 줘서 3,000원을 받는 고깃집에서 일하면서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사회 경험을 다양하게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 돌솥밥 집에선 나보다 한 살이 많은 대학생 언니와 함께 일했다. 나는 체구가 작고 가녀린 편이었으나 대학생 언니는 큰 키에 듬직한 체격을 갖고 있었다. 작은 체구로 무거운 돌솥밥을 나르다가 가끔 실수하는 내가 사장님 눈에 위태로워 보였는지 모르겠다. 아침 출근 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 저기, 오늘 돈 주려고 하는데…….
월급날도 아닌데 돈을 주겠다는 건 잘렸단 뜻이었다. 식당에선 대학생 언니를 종일제로 채용했다. 사전에 아무 얘기도 없었는데 그동안 일한 품삯 챙겨가란 건 요즘의 가치관으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나는 형편이 어려운 시기에 차마 집에다가 잘린 얘기를 할 수는 없어 재빨리 전봇대 옆의 벼룩시장 신문을 집어 들었다. 신문을 한 장 두 장 넘기다 보니 구인 광고가 눈에 띄었다. 고깃집과 같은 시급 3,000원짜리 알바는 자동차 담보대출 명함을 돌리는 일이었다.
전화 연락 후 찾아간 곳은 시내에 있는 빌딩이었다. 목재로 된 문을 열고 들어가니 회장인지 사장인지 모를 남자가 커다란 책상에 앉았고 그 앞으로 검은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순간 뜨악한 느낌이 들었으나 자리에서 일어난 보스가 의외로 따뜻하게 나를 대했다. 그는 나더러 앉으라고 하면서 자신도 1인용 소파에 앉았다. 뭔가 편한 듯하면서도 낯선 공기가 감지되었다. 어쩌면 여긴 일반 회사가 아니라 영화에 나오는 조직 두목의 사무실일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일었다. 먼 훗날 철이 들었을 때 안 사실이지만 그곳은 대부업체였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은 우리 일을 해 본 경험이 나중에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좋은 추억이 될 거란 말을 했다. 시급은 실제 일을 한 것보다 조금 더 쳐 주겠다는 의미심장한 말도 했다. 뭐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해도 돈만 많이 받을 수 있다면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바로 일은 시작됐고 빌딩 앞에는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봉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빵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느낌이 꼭 영화에 나오는 조직폭력배 중의 한 사람 같았다. 봉고차 안에는 나 말고도 연령대가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이 있었다. 일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그 차에 타고 있던 사람 중 내가 가장 오래 그 일을 했다. 사람들이 자꾸 그만뒀는지 차 안의 얼굴들은 매우 자주 바뀌었다.
빵모자 아저씨는 매일 다른 장소에 나를 내려놓으면서 한 뭉텅이의 명함을 던져주고는 사라졌다. 내가 명함을 다 돌린 후 공중전화로 전화하면 데리러 오는 식이었다. 소지한 명함이 남김없이 내 손에서 떠날 때까지 나는 분주히 움직였다. 저녁이 되면 쉴 틈도 없이 나는 새로운 일터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빵모자 아저씨가 나를 시흥시 정왕동 시화공단 안에 있는 엄청나게 큰 지하 주차장 입구에 내려 주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명함 뭉치를 가방에 숨겼다. 어둠의 굴을 향해 마치 무장 공비처럼 침투해 내려간 후 내 손바닥보다 작은 명함을 빼곡히 세워져 있는 자동차의 운전석 틈새마다 부지런히 꽂아나갔다. 공설운동장만큼 넓은 공간에 차들이 꽉 차 있던 주차장에서 체구가 작은 나는 남들 이목에 띄지 않고 명함을 꽂기에 안성맞춤이었고, 나는 날렵하게 몸을 움직였다.
절반 이상 작업을 진행할 때쯤이었다. 오른쪽 얼굴에 날쌘 주먹이 날아와 꽂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맞은 부위가 얼얼하면서 눈물이 나려고 했다. 고개를 들어보니 눈앞에 할아버지 한 분이 내게 눈을 부라리며 서 계셨다.
- 야! 이런 거 돌리지 마!
나는 아프고 분했으나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 자리를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빵모자 아저씨가 워낙 무섭게 생겨서 그날의 일을 차마 얘기하지는 못하고 나 혼자 삭히기로 했다. 내 성격이 워낙에 소심했던 터라 남한테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했다. 명함 돌리는 장소가 매일 달랐기에 설마 여기를 또 오진 않으리라 생각했다.
다음 날에 빵모자 아저씨는 또 다른 장소에 나를 내려 주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후에 아저씨는 나를 또 정왕동의 그 지하 주차장 앞에 내려 주는 것이었다. 싫다고 말하기 두려웠기에 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렸다. 나는 전처럼 어둠의 굴속으로 들어갔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길, 이번엔 걸리지 않길 바라면서.
워낙 차가 많은 주차장이었기에 명함은 빠르게 소진되었다. 할아버지한테 걸리기 전에 얼른 돌리고 나가야지 하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데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먼저보다 두 배 이상의 강도와 세기로 주먹이 날아왔다.
- 야! 너 내가 이런 거 돌리지 말라고 했지! 왜 또 돌리는 거야! 얼른 나가!
오른쪽 광대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서러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 자존심과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걸 스스로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밖으로 나와 거울을 보니 맞은 부위가 벌겋게 부어 있었다. 터벅터벅 힘없는 발걸음을 움직여 공중전화 앞에 서서 빵모자 아저씨의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 아저씨, 저 다음부터는 이 주차장에서는 일 못 할 것 같아요.
- 왜?
- 저번에도 그렇고 오늘까지 두 번이나 관리인 할아버지한테 주먹으로 얼굴을 맞았어요. 다음부터는 여기 말고 다른 데 내려 주세요.
- 알았어!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갈게.
처음 일을 시작할 때 회장같이 생긴 사람이 왜 우리 일을 한 경험이 나중에 좋은 추억이 될 거라 했는지, 왜 시급을 실제 일한 것보다 더 쳐 줄 수도 있다고 했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분노는 쉽게 삭여지지 않았다. 얻어맞은 것이 부끄러워 누군가에게 털어놓지도 못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 때면 가만히 냉장고에서 꺼낸 알코올 한 잔으로 쓰라린 마음을 달래곤 했다. 잊어버리고 기억에서 지우는 것이 망각이라면, 그것만으로 괜찮아질 수 있다면 좋으련만,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슬픔을 애써 외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시 그분은 칠순은 족히 넘어 연로하신 노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도 힘없는 계약직 노동자였을 것이다. 그분 입장이 얼마나 난처했을지, 주차장을 더럽히는 내가 얼마나 미웠을지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흘렀다. 난 불혹을 넘겨 어느덧 마흔 중반이 되었다. 지금껏 옛 기억에서 해방되지 못한 건 아직 철들지 못해 옹졸한 마음 탓이리라. 새삼 누군지도 모르고 다시 만날 일도 없는 그분을 나는 너무도 오랫동안 미워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스스로 그분을 가해자의 울타리 안에 가둬놓고 괴로워하며 살아온 걸 이 가을의 끝무렵에야 깨닫는다.
노랗고 붉게 낙엽이 진 거리에 늦가을 찬 공기가 내려앉는다. 낯선 이들이 분주히 총총걸음을 한다. 가을이 가기 전에 그 옛날 족발집 사장도, 주차장 관리인도 이제는 기억 속에서 내려놓고 한층 가벼워진 마음으로 이 거리를 걸어야겠다. 멀리 북쪽에서 겨울나러 왔는지 까마귀 떼 한 무리가 군무를 이루며 날고 있다.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공중을 향한다. 사람이 그리운지 까마귀 떼가 전봇대에 줄지어 내려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