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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Aug 08. 2022

최순우 옛집에서 일합니다

2022년 4월부터 12월까지

올해 4월부터 최순우 옛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이 좋습니다. 아니면 직장에 있는 시간이 가장 길잖아요. 직장에 대해 이렇게 구구절절 좋아하는 이유를 말할  있는 곳에서 일할  있는  행운에 가깝죠.

명자꽃이 핀 4월의 최순우 옛집



일단, 사계절 변화하는 뜰이 좋아요.

시간의 변화를 가까이서 생동감 있게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더울 땐 덥고 추울 땐 춥지만 그것도 나름 좋아요. 계절감을 느끼는 순간에는 나 역시 시간에 속해 있구나! 확인되어서요. 그거 아세요? 멀미가 나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시각 정보랑 몸에서 느끼는 균형 감각이 불일치해서라고 해요. 그래서 운전하는 사람은 멀미를 덜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운전자는 운전의 흐름을 감각하고 반응하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옛집에 있는 건 시간이 흐르는 속도와 제가 감각하는 속도를 잘 맞출 수 있어서 좋아요. 지금 저는 계절과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느끼고 감각하고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출근 전에 매번 일기예보를 확인하는 건 새로운 루틴입니다. 날씨를 준비하는 자세를 몸에 새깁니다. 변화하는 뜰의 모습은 계절과 잘 맞습니다. 그러니 사는데 멀미가 덜 납니다. 이곳의 저는 계절의 속도를 온몸으로 체감해서 좋습니다.

매화나무가 핀 4월의 최순우 옛집



개인과 가족의 삶이 남아있는 있는 한옥이 박물관이 된 것도 좋습니다.

별게 다 좋은가요? 그렇지만 저는 이 집이 살림집이었다는 것도 좋고, 박물관이 된 것도 좋습니다.

이 한옥은 궁궐도 아니고 종교 건축도 아닙니다. 본래 용도가 살림집인 집이라서 한 가족이 살아가는 생활감이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꼭 지켜야 할 규칙이나 예법을 대신해서 살면서 ‘적당히'라는 어려운 요구를 소화합니다. 생활이 편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도록 또 청소와 관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가꾼 집. 쓰다 보니까 #오늘의집 태그를 하나 달아야 할 것 같네요. 그 어려운 요구를 이렇게 저렇게 소화해낸 균형감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겠다 싶어요. 이 공간이 박물관인 것도 좋습니다. 요새 공간을 누리는 건 다 돈이잖아요. 나를 위한 공간이라는 게 결국 돈이 있어야 누릴 수 있을 때가 많죠. ‘프라이빗’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저랑은 별개처럼 느껴지거든요. 한참을 앉아 있어도 별 눈치도 안 받고 이런 감각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민문화유산으로 무료 개방하는 곳이니 마음이 편합니다. 저는 앞으로도 평생 시민일 테니, 계속해서 이곳에 올 수 있겠죠? 그래서 좋아요. 여기 계속 올 수 있다고 하니까, 이곳은 저의 장소입니다.

안방에서 바라 본 뒷뜰의 향로석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화재가 된 집입니다.

이곳이 지켜진 배경이 좋아요. 작업실을 구하기 위해서 알아본 한옥이 최순우 선생의 집인  알고 시민과 기업들의 성금을 모아 지켰다는 사연이 놀라워요. 기준의 다양성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문화재라서 소중함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소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화재가  집이라니. 많은 이들의 마음을 동하게 했기 때문에 문화재가   거잖아요. 조건이 아니라 욕구에서 시작하고 결국은 현실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집에 녹아 있습니다. 그러니  집은 다양성의 가시화가 아닐까요? 마음과 태도로부터 중요함을 판단하는 기준을 만들었으니까요.

뜰에 설치된 '최순우 옛집 보존에 도움을 주신 분들' 명판

한 사람의 일생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습니다.

그의 삶을 통해서 제가 여기에 어떻게 있을 수 있는지 알게 되어서 좋습니다. 최순우라는 인물의 삶을 살펴보다 보면 한국의 박물관이 어떤 모습과 어떤 사람들을 통해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됩니다. 덕분에 박물관이라는 세계에 초대받았다는 착각이 듭니다. 누군가의 이야기 끝에 ‘나'라는 사람을 끼워 넣는 게 굉장히 어색하지만, 어느새 그렇게 되었습니다. 당대의 예술가와 교류하며 살아있는 전통, 공예, 한국미라는 것을 만들어간 행보도 너무 떨리게 좋습니다. 자신이 알게 된 것은 글을 통해 꾸준히 남긴 것도요. 박물관 안과 밖에서 많은 것을 살피고 매번 그 기록을 글로 남기는 부지런한 사람이라서 저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물관을 장르와 위계의 경계선이 아니라 정말로 소속감이 드는 울타리로 다양한 사람과 영역을 포괄했다는 인상이 들거든요.

최순우 선생님이 생활하시던 '사랑방'



마지막으로 제가 많은 사람을 환대하는 사람이 되어서 좋습니다.

대문 앞에서 머뭇거리는 분들께 “천천히 둘러보시고 설명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기관이 갖는 규모와 성격 덕분에 한 분 씩 오시더라도 안내와 설명을 합니다. 제 장래희망은 좋은 사람. 좋은 대화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이곳에서 저의 역할은 그런 지향성에 맞닿아있습니다. 매일 가까이 관람객을 만나고, 학기마다 새로운 봉사생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변화하고 반응하는 과정이 좋습니다. 잘 소화해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서투르고 부담스럽고 막연히 무서울 때도 있지만 일단 긍정합니다. 잘하고 싶습니다. 잘 환대하고 싶어요. 서로에게 좋은 방향과 영향력을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기는 그런 태도를 지속하게 만듭니다.



뭐, 그렇다고요.



혜곡최순우기념관에서 2022년 4월부터 12월까지. 9개월간의 근무했습니다. 근무하면서 작성했던 글들은 아래의 링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고무신과 물확 

https://cafe.naver.com/ntchfund/14397


2. 우와~ 함지박이 이렇게 커? 

https://m.cafe.naver.com/ntchfund/14465



3. 간송미술관 다녀오셨나봐요? 

https://cafe.naver.com/ntchfund/14436


4. 장독대 정말 오랫만이다~

https://cafe.naver.com/ntchfund/14479


5. 선생님, 자리를 옮겨주시겠어요? 향로석

https://m.cafe.naver.com/ntchfund/14448


6. 최순우 선생님이 직접 그리신 거예요. 딸에게 쓴 엽서

https://cafe.naver.com/ntchfund/14493?boardType=L



7. 당신의 소감을 말해주는 것이 나에겐 큰 공부가 되었다. 전시 <우현 송영방을 기리며>

https://cafe.naver.com/ntchfund/1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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