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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 Oct 03. 2022

전시를 보러 갑니다

내가 반복을 통해 알게 된 것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면 그걸 왜 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기 어려워진다.

설명하기 힘들다. 나에게는 전시를 보는 일이 그렇다. 온몸이 차갑다고 느껴질 때. 정처 없는 걷기도, 경도되며 읽던 책도, 시간을 죽이며 보던 예능도 위로가 안 될 때 뛰쳐나간 곳. 좀 더 나은 곳이라고 표상한 장소. 지금의 나와 어울리지 않아도 갖고 싶은 고요가 있고 지적인 곳. 전시를 보러 간다.


뭐가 재밌는지, 왜 보러 가는지 물어보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전시를 보러 간다. 지금 생각해보면 다른 세계를 향해 다가 가려는 행동이었다. 나의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은 그랬다. 다들 비슷했을 거라 생각한다. 이런 내용 없는 이미지는 대학교가 가장 심하니까. 세상이 만들어준 환상이 있고 물꼬만 틀면 여러 연상들이 따라왔다.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알면서도 지금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뭐만 하면, 이걸 넘어서면.... 여전히 공감 간다.  그러니 너무 부끄러워하거나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보다 어렸으니, 좀 봐주기로 한다.


그래도 좋았던 점을 생각해보면 스스로 생애의 시작점 가까이 서있다고 자각했고, 이 삶의 고삐를 잡기 위해서 노력했다는 점이다. 그 과정은 반쯤은 부모님과 오랜 친구들을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내가 자라온 환경이 아주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외딴집에서 2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이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비교적 적었고 대부분이 가족에게서 나왔으므로 나는 세계를 넓힐 필요가 있었다. 내가 생각한 문제적 장면들이 정말 문제인지도 확신할 길이 없다고 느꼈으니까. 임의로 세상을 넓히는 방법으로 정한 것이 전시였다. 다들 경험 안에서 답을 찾는다. 미대를 다니던 나에게 세계를 넓히는 반복적인 행위 중 하나가 전시를 보는 일이었다. 뾰족한 방법이 없어, 별 수 없이 선택한 것이고 그렇게 선택한 이후에는 그게 방법인지 이유인지 뒤엉킨 상태로 전시를 보러 갔다.


같은 곳에 계속 있으면 알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잘 모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모를 곳으로 답을 구하러 갔다. 안전지대를 벗어나 떠나온 길에서 방황하며 탐색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러니 방황한 그 자리에 터를 꾸리거나 맞는 길로 보이는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열심을 넘어서 잘 사는 법,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법, 나눌 수 있는 경계가 가족을 넘어선 사람. 취미와 취향이 있고 휴식이 있는 삶, 죄책감을 남기게 하지 않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랬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서면서 많은 것이 변했지만, 갖고 싶은 것들은 여전히 갖지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세상은 좁게만 느껴졌다. 전시를 보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여전히 아주 힘이 없는 이미지만 나열했다. 다른 방법도 없었고 계속 전시를 보러 다녔다. 반복 속에서 전시 보는 일은 이제 몸을 쓰는 일이었고 다른 방식으로 뻗어보는 동작이었다. 근육이 생길 때까지 그냥 했다.  


남들처럼 나도 기어이 해내는 일이 하나쯤을 있다고 열과 성을 다했다. 하루 반나절을 이동해 도착한 목적지에서 나는 다시 길을 헤매었다. 도착했음에도 안주할 수 없다. 도착한 곳은 사방이 흰 벽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이미지로 둘러싸여 가로막혀 있다.  불가사의한 시각언어들 사이에서 혹 놓친 것이 없나 스스로를 의심하며 가깝게 또 멀게 계속해서 서성인다. 신이 보낸 미래의 예언처럼 큰 뜻이 있으리라 믿으며 반복해서 바라봤지만 결국 매번 떠나왔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은 무엇이며 무엇을 기억해야 할지. 왜 이다지 힘든 일을 나는 하고 있는 것인지.  반복들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해야 했다. 깨달음을 얻야만 했던 강박적인 여행이었다.


전시장 안에서 나는 나에게 주문을 외워주었다. "나는 이 안에 있어. 고요 안에 있어. 말없이 뭔갈 바라보는 사람들 안에 있어."라고. 그래서 내가 편안하지 않아도, 행복에 폭 잠겨 있지는 않아도, 행복의 꼬리 같은 걸 봤다고. 어쩜 내가 더 많이 빨리 찾아가면 분명한 형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도 설명할 수 없는 반복을 했다. 그리고 반복들 사이에서 변화된 삶이 생겨났다. 그게 전시 때문이냐면 모르겠다. 한 가지 일을 오랫동안 반복하게 되면 그걸 왜 하고 있는지 이유를 찾기 어려워지니까. 이유인지, 목적인지, 방법인지 모르겠다. 대학 이후의 시간부터 지금까지. 그 사이에 변화의 지향은 스스로를 돕는 자가 되기 위해서, 그럴듯한 장면을 갖기 위해서 움직였다. 시작점에서 분명 멀어졌다.


지금 내가 아는 건, 하얀 벽에 걸린 건 신의 예언문이 아니라는 것. 꼭 힘들게 뭔갈 얻고 해내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모르는 부분은 언제나 있고 빈틈이 있는 상태에서도 충분히 말할 수 있다는 것. 내가 좋았던 건 지적인 내용이 아니라 진득하게 관찰받고 호감 어린 반응이었다는 것. 전시상황은 혼자보다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을 때 혹은 누군가와 함께 할 때 더 좋다는 것. 전시를 보러 간다. 그게 뭔지 여전히 모르지만 이제 예전보다 어렵지 않게 헤맨다. 조금 더 능숙하게 두리번거린다. 강박적인 깨달음이 없어도 된다는 걸 안다. 나는 이 고요와 응시 속에 있고 이제는 조금 아는 장면. 익숙한 장면이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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