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마주하는 감상이라는 자리
이름을 바꾸고 인사드리네요. 새 이름은 [문안]입니다.
* 門內 현관 문 안쪽, 우리가 모이는 공간
* 問安 서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안부
* 文案 각자가 써 내려간 하나의 글
문안은 혼자서는 쓰기 막막했던 전시 리뷰를 온라인에서 함께 모여 써 내려갑니다. 관람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전시의 경험을 글로 이어가는 모임입니다. 이름은 바뀌어도 형태는 동일합니다. 120분간 집중해서 결과물을 만들고 나눕니다.
1월의 기록 공유합니다~
뚜벅사
광복 80주년, 이순신 탄신 480주년 특별전이었습니다. 뚜벅사님은 전시를 보고 돌아와 1–3부의 흐름을 차근히 짚어주셨습니다. 각 부가 무엇을 말하고 있었는지, 어디에서 힘을 주고 어디에서 방향을 전환했는지 살펴보는 기록이었습니다. 단순한 인상이 아니라, 왜 멈추었는지, 무엇이 질문이 되었는지를 또렷하게 적어주셨습니다. 리뷰를 소개하며 전시장 안에서 초등학생들이 진지하게 관람하고 있었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한 인물을 기념하는 자리가 세대와 함께 호흡하는 공간이 되는 순간이 전해졌습니다. 전시 제목에 ‘우리들의’라는 말이 비로소 구체적인 얼굴을 갖는 대목이기도 했습니다. 90분 동안 집중해 쓴 글은 한 편에 담기지 않아 1, 2편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두 번에 걸친 기록을 따라 읽다 보니 전시를 다시 걸어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다른 사람은 이 전시를 어떻게 보았을까? 궁금해지면서 하나의 기록이 또 다른 감상을 부르는 자리였습니다. 전시는 3월 3일까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명절 연휴에 찾아가도 좋겠습니다. 감상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뚜비두의 리뷰
[문화역서울284] UNFOLD X : LET THINGS GO 관계들의 관계
문안의 회차를 늘리면서 뚜비두님과 꽤 자주 만났습니다. 어떻게 리뷰를 이어가실까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하나의 전시를 끈기 있게 여러 차례 반복해서 관람하고 리뷰를 작성해 주셨어요. 리뷰의 목표가 처음부터 '언어화되지 않는 감각에 집중하고 이해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했는데, 역시 그런 분이기에 가능한 리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번 리뷰의 대상은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융합예술 페스티벌 《UNFOLD X》였습니다. '김치 앤 칩스'라는 듀오가 기획한 이 전시를 우연히 보게 되었지만, 다음 일정을 미뤄두고 끝까지 관람하실 만큼 몰입하셨다고 합니다. 그 여운이 깊어 이후에도 몇 차례 더 전시장을 찾으셨다더군요. 특히 디렉터의 설명을 직접 들은 뒤에는, 내년에도 전시가 열린다면 아예 일정을 비워두고 충분히 살펴보겠다는 계획까지 덧붙이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저 또한 다음에는 꼭 시간을 내어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4회 서울융합예술페스티벌 언폴드엑스 2025 Let Things Go : 관계들의 관계》는 ‘페스티벌’의 순수성을 탐구하고, 축제의 본질이 지닌 근원적 감각-몸의 리듬, 관계의 진동, 집단적 기쁨-을 다시 호출하려 한다. 언어가 있기 전 인류는, 몸의 움직임, 제스처, 리듬, 목소리의 억양, 표정, 호흡의 패턴 등을 통해 공동체적 감각의 행위, 즉 ‘함께 느끼기’를 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행위는 세계를 이해하는 공동의 수단이었고, 행위를 통해 발생하는 전율과 진동은 서로를 이해하는 사회적 기술이 되었다.
상상하건대, 어느 날 아름다운 붉은 노을이 누군가의 목소리를 자극했고, 그 소리가 다른 이의 몸을 움직이게 했으며, 그 움직임은 공기를 흔들고, 공기의 진동은 집단적 리듬을 만들었으리라. 개별적 영향이 서로에게 스며들며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가 변형과 반복을 거쳐 집단의 기쁨, 즉 축제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축제의 역할은 종교적 제의로, 위계와 맞서는 민중적 항거로, 자본과 기술의 정치적 도구로 변모했다. 축제는 유기적 연결망이기보다 확정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시스템처럼 기능하게 되었다.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는 페스티벌을 단순한 유희가 아닌, ‘일상의 규범과 위계가 뒤집히는 시간’이자 ‘다른 질서’를 예행 연습하는 실험의 장이라고 정의했다. 그의 말처럼, 느슨해진 질서 안에서 <Let Things Go : 관계들의 관계>는 이 세계가 독립된 개체들의 나열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를 매개하고 함께 변형되며 서로를 통해 재조립’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Let Things Go>는 ‘차이’에 대한 인정과 받아들임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사회학자 브루노 라투르의 “사회란 우리를 결속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라, 결속되어 가는 그 과정 자체”라는 말처럼, 올해 언폴드엑스 페스티벌은 완성된 결과들의 전시이기보다는, 참여하는 모든 것들이-사람, 기술, 사물, 공간, 소음, 진동, 시선, 전기회로, 개념, 행위 등-동등한 행위자로서 서로를 매개하며 유기적인 연결망을 생성해 내는 ‘과정’에 더 큰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축제 기간 13일 내내 이 과정이 멈추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전시뿐만 아니라 저녁 공연, 시네마, 토크 등의 다양한 해프닝 등을 구성했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춤의 몸짓 언어들, 세계를 바라보는 미시적이고 거시적인 관점들, 비인간적 존재의 시선으로 바라본 인간의 역사, 기술로 쓰는 허구의 역사, 규범을 해체하는 성정체성의 감각 등 예술과 기술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생성된 수많은 세계의 조각들을 ‘축제’라는 이름으로 다시 연결하고자 한다.
[전시 현장과 감각의 복기] 뚜비두님은 보기 드물게 서문이 좋은 전시라는 소감을 남겨주셨습니다. '페스티벌'이라는 키워드가 문화역서울284 로비에 위치한 첫 번째 작업과 만나, 원초적 감각과 직감을 깨우면서도 기술을 접목한 시도가 단번에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멀티채널로 재생되는 춤추는 사람들을 보며 마치 사막의 '버닝맨' 축제를 떠올리기도 하셨다지요. 예전에 해방촌 사람들과 함께 충남에서 비슷한 행사에 참여했던 경험을 떠올리며, 춤과 리듬이 어우러질 때 전해지는 특유의 감각이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전시가 유난히 무의식과 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왜 전시를 보러 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나'를 만나기 위해 신체의 감각을 새롭게 여는 과정이라는 말씀이 저에게도 큰 영감이 되었습니다. 무의식은 언어화하기 어렵기에 평소에 눌러놓는 경우가 많은데, 미술관에 가면 그 마음이 편안하게 풀리는 느낌을 종종 받으신다고 해요. 사진과 인쇄물을 꼼꼼히 살피며 전시를 복기하는 모습에서 직감과 감각을 세우려는 집중력이 느껴져 30분의 대화가 금방 지나갔습니다.
[인공지능과 인간의 감각] 전시의 주제와 감상 방식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으로 흘러갔습니다. 흥미로운 언어적 예시를 들어주셨는데, 바로 인공지능을 지칭할 때 '에'와 '에게' 중 무엇을 붙여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에'는 무정 명사에, '에게'는 유정 명사에 붙습니다. 많은 글에서 AI 뒤에 ‘에게’를 쓰지만, 사실 AI는 생명이 아니라는 점에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핵심은 '신체가 있어야 반응과 선택이 생긴다'는 점이었습니다. 생물체는 맥락에 따라 유기적으로 반응하고 변화하지만, 단순히 방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연산한다고 해서 그것을 생명체와 같은 '선택'이나 '반응'이라 부르기는 어렵다는 것이죠. 아이들이 개와 고양이를 쉽게 구별하는 것과 달리, 언어 모델 기반의 AI가 이를 복잡하게 처리하는 과정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개체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 뒤에 '에게'를 붙이는 일은 여전히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나 자신을 이해하는 캘리브레이션] 또 하나 재밌는 예시는 '캘리브레이션(Calibration)'이었습니다. 본래 맛과 향을 구별하는 센서리(Sensory) 훈련에서 타인과 나의 감각 차이를 보정하는 과정을 지칭하는데, 디자인 분야에서도 색감을 맞출 때 자주 쓰이는 용어입니다. 나의 감각이 틀린 것이 아니라 표현의 방식이나 강도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나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이지요. 이 과정을 반복한다고 해서 타고난 감각 자체가 변하는 건 아니지만, 타인의 감각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같은 경험을 하고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해서 우리의 경험이 결코 평평할 수는 없으며, 데이터가 아무리 많은 인공지능이라도 닿을 수 없는 '인간만의 공백'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본편보다 전달자인 저의 해설이 길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냥 휘발시키기엔 너무나 소중한 대화들이었습니다. 이 깊은 사유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 뚜비두님의 리뷰를 직접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뚜비두님, 소중한 감상 나누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니
블로그에 자신을 소개하며 이렇게 써주셨네요. [단순히 뮤지엄에서 작품이나 유물을 보고 기법이나 그 대상물에 대해 정보를 알고 내 삶과 연계시켰으면 한다. 박물관 미술관을 통해 한 움큼 성장했으면 한다. 삶에 필요한 사고력 향상을 목적으로 교육활동을 고민한다.] 소개처럼 긴 시간, 전시 감상과 삶을 엮어놓은 경험이 많은 분이셨어요. 그래서 루이스 부르주아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있었는데, 이번 전시에서는 인식이 변화하면서 생각했던 지점들을 풀어주셨습니다. 정말이지 삶에 딱... 엮여진 감상이 아닐까요? 사실 처음 인사를 나누고 아무 안내도 없어서 조금 당황하신듯 했지만, 긴 줄글 만큼 푹 감상 안에서 잠겨있으셨던 것 같아서 내심 기쁘기도 했습니다! 블로그에 있는 다른 글들도 살펴보는데 아주 솔직하고 재밌는 감상이 잔뜩입니다 >_< (노다지.. 노다지입니다..!) 지니님 또 오세요!!! 그리고 감상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도 늘 이 작가의 전시가 무겁고 압박처럼 다가올 때가 있어서 가는 길,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너무 작품의 어두움에 매몰되지 말자고. (중략) 부르주아 특유의 차가운 기운에 잠식되지 말자,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 만난 부르주아는 어둡고 답답하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이었다.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치부와 슬픔을 그녀가 대신 직시하고 성찰해 주기에, 우리는 그녀의 작품을 통해 나의 슬픔을 안전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덕분에 오늘은 그녀의 삶에 함몰되기보다 관조자의 입장에서 편안하게 전시를 즐길 수 있었다. 아픔을 승화했다는 평가 뒤에 숨겨진, 우유부단해 보일 만큼 솔직하고 금기에 도전했던 한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이소
이번 글은 제가 특별히 ‘모셔’ 왔습니다. [문안]을 통해 꼭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은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원문을 그대로 옮겨 두었습니다. 여러 전시라는 시간을 통과하며 이 리뷰어가 벼려온 고유한 시선과 관점을 찬찬히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개인의 감상이 어떻게 단단한 문안(文案)이 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앞으로도 [문안]의 지향점과 결이 맞닿아 있는 좋은 글들을 종종 이렇게 업어와 소개하려 합니다. 감상 나누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전시를 이해 못하는 건 당신이 미술사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지난 12월, 도쿄도 미술관에서 고흐 전시를 관람했다. 일본어를 잘하지 못해 설명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신기하게도 고흐에 대한 이해가 더 많이 생겼다. 전시 제목 <고흐의 집>에 맞게 고흐가 지냈던 지역을 기준으로 그때 그렸던 그림들을 세션으로 나눴다. 그래서 고흐가 그 장소에 있을 때 어떤 감정과 어떤 사물에 집중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옆에 있는 국립서양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전시도 편안했다. 그림과 그림 사이의 거리, 그림 크기별로 잘 정리된 세션, 자연스러운 동선까지. 전시를 보는 내내 ‘이 세션을 어떤 기준으로 한 거지?’ 궁금했는데, 제목을 번역하니 ‘인상주의 실내화’ 전시회였다. 이 제목 한 줄로 모든 그림과 세션이 이해되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후, 보았던 국내 전시들은 유독 아쉬움이 컸다.
마이아트뮤지엄 ‘클림트와 리치오디의 기적’ 전시는 12개 세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천장도 낮고 구불구불한 장소인데 말이다. 세션은 자연, 여자, 농부 등 그림에서 연상되는 키워드로 나눴다. 이 가문이 왜 이 그림을 컬렉팅했는지, 어떤 기준이었는지를 보여줬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장 유명한 ‘클림트 여인의 초상’은 애매한 곳에 있었고, 이 그림이 왜 비싸고 귀한지에 대한 설명만 넘쳐났지만 정작 전해지는 ‘한 줄’은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 ‘인상주의에서 초기 모더니즘까지, 빛을 수집한 사람들’ 전시도 마찬가지였다. 81점이라는 많은 그림이 있었지만 세션을 너무 세분화했고 제목과 연결되지 않아 그림을 기억하기 어려웠다. 인물화 세션에는 ‘마네’가 쓰여 있었지만 마네의 그림은 없었다.
중간쯤 노란색 벽지로 꾸며진 ‘에두아르 뷔야르’ 작품 전용 방이 있었는데 벽보에는 어떠한 정보도 없었다. 뷔야르는 후기 인상주의에서 20세기 현대 미술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 나비파 화가인데 말이다.
일본에서 본 전시들과 비교하니 차이가 명확했다. 일본 전시는 제목 한 줄이 모든 것을 설명했다. ‘이 전시는 이것을 보여주려 합니다’라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고, 모든 작품 배치가 그 메시지를 뒷받침했다. 반면 국내 전시들은 좋은 작품들이 있음에도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라는 의문만 남았다.
일을 하면서 항상 ‘기획은 한 줄’이라고 말했다. 이번 경험을 통해 한 가지를 더 알게 되었다. 좋은 기획은 기획자가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기획이다. 그 한 줄이 모든 선택을 관통하고, 경험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그 의도를 읽을 수 있을 때, 그게 좋은 기획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랜만 #이소시각
추억돋는 2016년 영국 내셔널 갤러리
우리를 마주하는 감상이라는 자리 [문안]
* 門內 현관 문 안쪽, 우리가 모이는 공간
* 問安 서로에게 건네는 다정한 안부
* 文案 각자가 써 내려간 하나의 글
문안은 혼자서는 쓰기 막막했던 전시 리뷰를 온라인에서 함께 모여 써 내려갑니다. 관람자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전시의 경험을 글로 이어가는 모임입니다.
토요반 | 3월 21, 28일 오전 10-12시
월요반 | 3월 2, 16, 23일 오후 8-10시
이메일로 받은 줌링크로 접속해주세요. 요일, 횟수 제한 없습니다
모임 시간은 약 120분으로, 글쓰기 90분 + 공유 및 대화 30분으로 구성됩니다.
마지막 30분에는 화면공유로 작성한 리뷰를 함께 읽고, 감상과 생각을 나눕니다.
리뷰의 형태는 인스타그램, 브런치, 블로그, 노션 등 자유로운 플랫폼을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모임이 후 7일 이내, 완성한 리뷰 링크를 이메일로 보내주세요. 보내주신 글은 묶어 게시합니다.
한 시간 반은 생각보다 짧습니다.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를 먼저 정하고 시작해보세요.
글의 중심은 나의 마음, 나의 발견에서 출발합니다. 전시를 요약하기보다, 그 순간의 나를 남겨두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무엇이 있었다”에서 끝내지 않고 “나는 그것을 이렇게 받아들였다”로 마무리해보세요.
기록들을 쌓아서 만나고 싶은 장면이 있다면, 상상하면서 기록을 만들어봅시다.
참여 신청 및 문의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해주세요~
디엠으로 신청하시고 2만원 입금하시면 신청 완료.
https://www.instagram.com/yhgh0000/
문안은 전시를 본 관람자의 감상이 참고할 의견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시민의 리뷰와 감상은 전시 자문이나 프로그램 기획 등 박물관의 방향을 고민하는 자료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모임은 개인적인 감상을 남기는 자리이자, 관람자 개인의 시선이 공적 언어로 연결되는 연습의 자리입니다. 지금 쓰는 당신의 리뷰는 누군가에게 다음 전시를 고민하는 힌트가 될 수 있습니다. 문안은 그 가능성을 함께 실현해보는 모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