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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랑윤 Sep 21. 2017

테레즈가 동물 보호 활동가였다면?!

영화 캐롤을 보고 난 후 패딩 충전재인 거위털과 오리털에 관한 이야기

안녕하세요.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30대 레즈비언 파랑입니다.



오늘은 영화 캐롤을 보고 떠오른 생각을 얘기해볼 건데요.


캐롤을 보면서 궁금증이 하나 생겼는데 그게 뭐냐 하면 [만약 테레즈가 동물보호 활동가였다면 캐롤에게 반했을까?]라는 거예요.



영화에서 캐롤은 골든 브라운색의 정말 고급스러워 보이는 밍크코트를 입고 있어요.



테레즈와 처음 만났던 날, 장갑을 찾아주고 난 다음, 처음 점심 데이트에서도, 함께 여행을 가서도 밍크코트는 빠지지 않아요. 여행을 갈 때 그 큰 코트 챙겨 다니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죠.



캐롤은 원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경험에서 나온 소설이에요. 백화점에서 단기 아르바이트하다가, 금발의 모피 코트의 여성에게 반해 영감을 얻어 소설을 썼다고 하니 캐롤이 영화에서 모피코트를 입고 나오는 건 당연했을 거예요.



근데 모피코트 가격이 어마어마하잖아요. 캐롤이 입은 코트는 도대체 얼마일까?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영화 속 모피코트는 오래된 모피들을 꿰매서 제작한 빈티지 코트라고 해요.



영화 배경이 1950년대 뉴욕이고, 그때의 뉴욕에선 밍크코트가 대유행이었지만 영화 속에선 캐롤 말고는 아무도 밍크코트를 입고 나오지 않아요.



아마 감독이 캐롤의 우아하고 매혹적인 분위기를 살리려 캐롤에게만 밍크코트를 입힌 것 같기도 하고요. 감독의 의도나 그런 것까진 제가 찾아보질 않았어요.



모피가 유행하고 난 후에 유럽에선 모피 거부 운동이 1980~1990년에 시작되었어요. 



영화의 배경은 1950년대니까 동물 학대가 가시화되지 않았을 때고 그러니 테레즈가 동물보호 활동가였어도 모피를 입은 캐롤과의 사랑은 아무 문제없었을 거예요.



문제가 있었다면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분류한 사회의 시선이 문제였겠죠.



만약 영화의 배경이 1990년 이후이고 테레즈가 동물보호 활동가였다면 테레즈는 캐롤에게 반했을까요?


제 생각엔  분명히 테레즈는 캐롤에게 반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어느 누구도 캐롤의 매력을 거부할 순 없었을 테니까요.



그녀들의 스토리처럼, 캐롤이 장갑을 매장에 놓고 가면 당연히 장갑을 찾아 줘야 하고, 그 빌미로 밥 한 끼 같이 먹고 데이트도 해야죠. 여행도 당연히 같이 가야죠. 캐롤인데.


그렇게 좀 더 지내다가 밍크코트가 이렇다더라. 혹시 알고 있었냐 얘기 나누면 되지 않을까요?



밍크코트 얘기를 더 해보자면, 1980년대에 모피 거부 운동이 시작되었지만 저는 모피코트가 동물 학대라는 것을 안지가 몇 년 안 됐어요.


 


궁금해서 찾아보거나 공부를 한 것도 아니었고, 인터넷 하다가 밍크코트를 만들기 위해선 밍크를 살아있는 채로 가죽을 벗겨야 하고, 코트 한 벌에 밍크 70마리에서 200마리까지 죽여야 한다는 글을 본 게 전부였어요.



그 후로 밍크코트를 입고 지나가는 아주머니를 보면 눈을 흘겼었고, 시어머니께 혼수로 밍코트를 해드렸는데 너무 좋아하셨다는 친구의 말을 들었을 땐 요즘 무슨 밍크코트냐며 한심하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번에 녹음을 준비하면서 이것저것 찾아본 결과, 모피 채취 과정만 동물 학대를 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패딩 충전재로 쓰이는 거위 솜털, 거위 깃털, 오리 솜털, 오리 깃털의 채취 방법 또한 너무나 잔인했어요.


앙고라 니트를 만드는 토끼털 채취 방법도 비슷했고요.



저는 이 전엔 동물학대와 패딩이 관련 있다는 문제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오리 먹으면 남은 오리털은 옷으로 만들겠지, 토끼고기 먹고 남은 털은 앙고라 만들겠지. 이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었어요.



현실은 제가 생각했던 거랑 많이 달랐어요. 살아있는 거위랑 토끼를 인간들이 못 움직이게 제압한 다음 손으로 잡아 뜯어 털을 뽑더라고요. 그러면 동물들은 고통의 비명을 질러요.



제가 말로 다 묘사하기는 그렇고 유튜브에서 영상 찾아보시면 금방 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실 거예요.


혹시 관심 있으시다면 EBS 하나뿐인 지구, 한 벌의 목숨 모피를 꼭 보셨으면 좋겠어요.


EBS 하나뿐인 지구, 한 벌의 목숨 모피. https://youtu.be/9XTxAwbkTbI



이 영상은 잔인하고 자극적인 장면으로 동물학대를 고발하는 게 아니라 잔잔한 화면과 조용한 나래이션으로 사실을 알려주는 영상이에요.



저는 그 영상을 보고 나서 바로 제 옷장으로 가서 제 패딩을 뒤져 안쪽 상표를 찾아봤어요.



거위 솜털 80% 거위 깃털 20% 리얼 라쿤 100%,


오리 솜털 80% 오리 깃털 20% 너구리 100%.



저는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는 사람을 손가락질하면서 나는 동물학대를 욕할 줄 아는 개념 있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제 옷장에는 채취 과정이 밍크털과 별반 다르지 않은 거위와 오리의 솜털과 깃털, 라쿤털이 있었어요.


그리고 저는 이것들이 어떻게 채취되는지 동영상을 보고 알아 버렸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었어요.



반복해서 자극적인 글을 읽고 사진과 동영상을 봐서 그런 걸까요?


옷장 속 패딩의 모자에 달린 라쿤털이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역겨운 기분에 만질 수가 없었어요.



죽은 라쿤이 옷에 달려있는 것 같았어요. 너무 끔찍했어요. 예전엔 부드럽다면서 얼굴에 비비기까지 했었는데 말이죠.



'밍크코트는 사 입으면 안 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는데 흔하게 입고 다니던 패딩을 사면 안 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문제 같아요.



그래도 많은 분들이 제가 느꼈던 감정을 느껴 보셨으면 좋겠어요.


내 패딩 속에 충전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자에 달린 털이 진짜인지, 진짜라면 어떤 동물의 털인지.



잔인하다고 피하고, 모른 척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알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감정을 느낀 그다음 단계는 이제 스스로의 고민과 선택이 아닐까요.



지금이 겨울이 아니라서 패딩을 입고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당장은 저 패딩 속의 동물 학대를 마냥 욕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올 겨울이 오기 전에 불쌍한 거위와 오리, 그리고 라쿤들을 금방 잊어버릴지도 모르고, 그냥 단지 불편한 마음만 하나 더 늘어난 건지도 몰라요.



곧바로 행동으론 옮기지 못해도 마음속에 그 불편한 거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제가 준비한 얘기는 여기까지 인데 괜찮게 들으셨나요.  


지금까지 들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구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식사도 맛있게 하시고, 잠도 푹 주무시구요. 안녕




레즈비언 생활 보고서 | 레생보는 팟캐스트와 인스타도 하고 있어요.

팟빵  http://m.podbbang.com/ch/14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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