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함께 자연주의 출산을 하여 친해진 아기 엄마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차가 없는 우리를 배려해 직접 온단다!
그래서 일단 남편에게 물어보려고 말했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다. 나는 말했다.
"표정이 왜 이렇게 심각해졌어? 아직 확정된 거 아니야~"
"난 또 정해진 줄 알고, 오면 좋은데 나가서 공부할 곳이 없을까 봐..."
이번 주는 남편의 에세이 기간이다. 남편의 에세이는 중요하다. 글로 밥을 벌어먹고 살 수 있도록 수행 중이기에 무사히 에세이를 써서 한 학기를 마무리해야 한다. 그래서 일단 금요일 저녁에는 남편이 나가서 공부할 곳이 없어 패스. 주말에 만나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해놓고도 또 걱정이 된다.
'나 혼자 아기 데리고 택시 타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을까? 힘들지 않을까?'
남편이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남편에게 혼자 좀 글을 쓸 시간을 주고 싶은데 체력도 상황도 쉽지가 않다.
엄마네 집에 가서 며칠 자고 오면 딱 좋은데 기차를 타기엔 너무 위험하다. 남편에게 묻는다.
"이번 딱 한 번만 엄마에게 와달라고 부탁해볼까?"
"응~ 기대를 내려놓고 한번 해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이번 주에 아이가 어린이집에 못 가고 또 남편이 에세이 기간이라 우리 위기상황이야ㅜㅜ
엄마 이번 주에 와줄 수 있어요?"
하필이면 이번 주 일요일에 약속이 있으시단다. 어디에 갈 수도 없고 또 올 사람도 없다. 엄마에게 실망하지 않기로 스스로에게 다짐했지만 금세 우울해졌다. 남편이 방에 들어가서 요가나 명상 좀 하고 올래?라고 말했지만 하기 싫었다. 그러다 침체된 이유가 불현듯 떠올랐다. 남편에게 말했다.
"아, 나 생리할 때 됐어!!"
나는 보통 생리하기 며칠 전에 기분이 좀 들쑥날쑥하다. 그래도 나는 엄연한 인간인데, 그렇게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면 동물이랑 다를 바가 없지. 이 우울한 기분을 생리 전 증후군이란 핑계로 해석하긴 싫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던 걸까?
어디를 갈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고 언제 코로나 팬데믹이 끝날지도 알 수 없는 막막함. 이제껏 잘 지내왔는데도 이렇게 불쑥 힘든 감정이 폭발한다. 게다가 운전을 못해서 우리가 갈 수 없고 또 엄마가 올 수 없는 상황도 힘들게만 느껴졌다. 남편에게 글 쓸 시간을 확보해 주지 못해 답답한 마음도 있었다.
딱히 대책은 없는데 생각은 계속 부정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부정적인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보다 그냥 그 감정에 머물러있고 싶었던 것도 같다.
그래도 시간이 되어 저녁을 먹었다. 미리 사둔 볶기만 하면 되는 찜닭을 해 먹었는데 맛있었다. 배에 음식이 차니 기분이 좀 좋아졌다.ㅋ 어디에 갈 곳 없고 남편과 어떻게든 버텨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던 것일까? 일단 아이를 재워야 해서 방에 들어갔다. 아이 덕분에 때에 맞춰 저녁을 먹고 평소처럼 잠이 들었다. 아이 덕분에 허튼짓하지 않고 생활하게 되어 고맙다.
다음 날, 평소처럼 일어났다. 아직 감정이 해소되지 않은 듯했다. 늘 하던 것처럼 태블릿을 켜고 아침 스트레칭을 했다. 오늘은 왠지 하기가 싫다. 겨우 운동을 끝내고 유튜브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그러다 우연히 "내 삶을 바꾼 다이어리 작성법"이란 영상을 클릭. 끝까지 보았다. 그분의 채널에 들어가 다른 영상들도 둘러보았다. 아이 둘을 키우는 보통 엄마, 진이라는 분.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며 단정하게 살림을 꾸리며 산다. 일상에서 작은 만족을 누리며 지내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사실 몇 달 전에 슬럼프가 왔다고 하셨다. TV를 보는 날이 계속되고 언제까지 이렇게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하셨다.
또 다른 영상에서 진 님의 고민을 엿볼 수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계속되고 또 남편은 3개월 동안 해외로 출장 가고, 밀린 영상편집 계획 등등...
나는 이런 소소한 진 님의 브이로그에서 뭐랄까 기운을 얻었던 것 같다.
아, 코로나 시대에 나만 힘든 건 아니구나. 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3개월 동안 출장이라니! 정말 힘드실 것 같았다. 공감이 되었고 '나는 그래도 3개월 동안 남편이 출장 가지 않아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들어 약간은 편안해졌다.
영상을 본 후 무엇에 홀린 듯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며칠 째 쌓여있던 두유팩, 재활용 쓰레기, 옷방에 걸려있는 빨래... 청소를 하면 내 마음도 차분해질 거라는 어떤 확신이 나를 그렇게 이끈 것 같다.
나는 한참 집을 치운 뒤 컵누들을 먹었다. (이때가 아침 7시쯤 되었을 거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먹어버렸다. 먹으면서 2주 동안 못 본 운동 뚱을 보았다. 뭔가 방탕한 생활(?)을 하니 다시 일상을 보낼 힘이 나는 듯했다.
그동안 나를 너무 '청정한 생활'을 해야 한다며 압박하며 살아왔던 걸까? 나는 아직 부처님의 경지가 아닌데, 단번에 높은 수행자들처럼 생활하려고 했던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다행히 하루가 지난 지금은 기분이 꽤 괜찮다. 다시 평소처럼 일어나 아침 스트레칭하고 불경을 읽고 글을 쓴다. 그리고 이번 겨울이 끝나기 전까지 꼭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다짐한다.
앞으로 또다시 이런 우울한 감정이 찾아올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어떤 방식으로 벗어났는지 매뉴얼처럼 기록해두어야겠다. 1. 때에 맞춰할 일을 하기(밥 먹기, 잠자기) 2. 유튜브를 둘러보며 사람들과 공감하기(나만 힘든 게 아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3. 집 치우며 마음까지 편안해지기 4. 나 스스로에게 조금은 여유로워지기
더 우울해지지 않고 벗어나서 참 다행이다.
덧.
아이를 어린이집에 한 시간만 보내고 데려와 놀이터에서 놀고 한살림을 들려 장을 보고 서점에서 구경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수업하고 있는 반 아이들의 학습 평가서 작성으로 힘드시다며.
마음속에서 '코로나 때 집에서 아이 보는 게 더 힘들어! 그래도 엄마는 엄마 몸만 챙기면 되잖아요!'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마침 급히 나가야 해서 "엄마 우리 지금 남편 만나야 해서 나중에 전화할게~"라며 끊었다.
왠지 모르게 통쾌(?)했다. '엄마가 애기 보고 싶으면 직접 오시던가~흥!' 이렇게 나는 엄마에게 소소하게 복수한다.
오랜만에 비눗방울을 불어주었더니 신나게 잡으러 가던 아이
분명 서점인데 매일 "장난감 많아~"에 가자고 한다^^;;
12월 10일-11일. 06:40분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