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옴니버스 VOL. 2 (1)
본격! 기생충학 전공자가 들려주는 기생충 이야기
전편인 기생충 옴니버스 1편의 마지막 글이 올해 4월에 쓰였으니, 6개월이 지나 [기생충 옴니버스]를 다시 연재하게 된 셈입니다. 본 시리즈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시던 애독자는 많이 없겠으나, 그래도 연재가 많이 늦어진 점에 대해 심심한 양해의 말씀을 드립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제게는 중요한 일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특히 박사학위라는 짧지 않았던 경주가 마무리되었고, '연구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경주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4대 보험이 생겼고, 연금에 가입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은 점점 커지고, 제가 처음 바라고 원했던 '자유로운 연구자'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건 갈수록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여전히 이 길이 좋아서 걷고 있고 지금은 잠시 숨 고르기를 하며 앞을 내다보고 있습니다.
기생충 옴니버스 2편이 시작되는 게 저의 (새롭게 시작된 연구원) 인생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서 조금 벅차기도 하네요. 2편도 1편처럼 잘 마무리할 수 있을지... 3편, 4편, 그리고 5편까지 연재를 이어갈 수 있을지 염려도 되지만, 늘 해왔던 것처럼 한 치 앞만 바라보며 걸어갑니다. 그럼 바로 2편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생충 옴니버스 2편의 첫 장은 '기생충 왕국', 그 거대한 제국의 면모를 샅샅이 살피기 위해 열어젖혀야만 하는 첫 서막인 '기생충 분류 (parasite classification)'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눈에 보이는 것부터 보이지 않는 것까지 다양한 기생충들이 비슷한 특징들로 한데 묶여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이들이 결코 "한낱 기생충"에 불과한 생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생충 분류에 대해 설명하기 이전에, [기생충 옴니버스 1편]의 명명법에서 다루었던 '생물 분류'에 대해 다시 한번 집고 넘어가 보도록 하자. ('기생충 분류'는 엄밀히 '생물 분류'라는 큰 틀 안에서 모든 약속과 체계 그리고 계통을 따르기 때문에, '생물 분류'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한다)
'생물 분류' 란, 둘 이상의 생물체 사이를 구조적, 혈연적으로 비교했을 때 얼마나 가까운지 (유연관계, 類緣關係)를 따져, 서로 비슷한 무리들로 함께 배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다리의 개수가 같은 것들끼리 묶는 다든지, 날개가 달린 것끼리 묶는 다든지의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이때 공통적인 특징들로 함께 배열되는 생물체의 무리들은 (같은 특징을 가진) 큰 무리로부터 세부적인 특징의 작은 무리까지 점차적으로 세세하게 분류된다.
출처: 너의 이름은? - 기생충 명명법 (기생충의 이름) 1편
간단히 말해, '생물 분류'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는 생물체의 무리들을 함께 묶고 또 나누며 배열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기생충 분류'란? 말 그대로 비슷한 특징을 갖는 기생충들을 함께 묶고 배열하며 각 기생충들이 유전적으로 또는 형태적으로 얼마나 유사한지를 따져가며 분류하는 일을 말한다.
과연 기생충들이 분류가 필요할 만큼 종류가 다양하고 그 형태가 각양각색일까? 보통 우리가 '기생충학'을 알기 이전에 연상되는 '기생충'의 이미지는 아마 아래와 같은 형상일 것이다.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기생충'을 실제로 본 적이 없지만, 누구나 떠올리는 '기생충'의 이미지가 바로 위 그림 속 선형(線形)의 벌레라는 사실은 아주 흥미롭다. 실제로 우리나라가 6.25 전쟁을 겪고 난 직후 1950-70년대, 대다수의 국민이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어르신들이 (어두운 변소 안에서) 눈으로 보아온 기생충의 모양은 바로 위 그림 속의 모양이었다. 과거 국민 보건을 위한 교육과 홍보의 목적으로 게시되었던 기생충 포스터를 몇 가지 들여다보자.
포스터 속 기생충 모양이 어떻게 묘사되어있는가? 기다란 실 모양의 벌레(worm)처럼 생긴 기생충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그 당시 전국적으로 유행하던 기생충이 토양매개성 연충류 (soil-trasmitted helminth), 그중에서도 실 모양을 닮은 선충류 기생충들인 회충, 편충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연충류? 선충류? 도대체 무슨 말일까? 이제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기생충의 분류에 대해 조금 알고 나면, 우리가 알고 있는 기생충의 이미지는 그저 '빙산의 일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또 보아온 이미지가 기생충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양한 종류의 기생충이 저마다의 삶의 방식으로 다채롭게 이루어가는 거대한 '기생충 제국'.. 그럼 이제 가라앉은 빙산처럼 숨겨진 기생충 제국을 탐방하는 그 첫걸음인 '기생충 분류'에 대해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기생 생활을 하는 기생체 가운데 동물성 기생체(animal parasite)를 주로 연구하는 학문을 기생충학이라 한다.
기생충 중에서 단세포 단위 (single cell-like unit)로 된 원생동물인 원충 (protozoa)에 대한 학문을 원충학 (protozoology)이라고 하며,
조직과 기관이 발달한 후생동물(metazoa)인 연충(helminth)에 대한 학문은 연충학 (helminthology) 또는 윤충학이라 한다.
이외에 절지동물 (arthropoda)을 연구하는 학문은 절지동물학 (arthropodology)이며..
이 세 가지가 기생충학의 주를 구성하는 분야이다."
- 임상기생충학 (채종일 외 11명 저) [1] -
의대 기생충학 교과서를 들여다보면 '기생충학의 범위'에 대해 가장 먼저 나오는 내용이 위의 설명이다. 사실 간략해 보이는 문장 몇 줄로 기생충의 분류체계는 대략 끝났다고 보면 된다. 정말일까? 간단히 정리된 도식을 통해서 다시 한번 살펴보자.
위 도식을 보면, '기생충학'에서 다루는 '기생충'은 가장 먼저 동물계에 속하는 동물성 기생체 (animal parasite)를 기준으로 범위가 좁혀진다. 그 이후 기생충은 원시적인 단세포성 생물체의 원충류 (protozoa)와, 조직과 기관이 발달한 후생동물인 다세포성 생물체의 연충류 (helminths)와 절지동물 (arthropod)로 나누어진다.
(그중 연충류는 또다시 선충류와 흡충류, 그리고 조충류로 나뉘게 된다.)
이중 원충류와 연충류는 숙주 내에서 기생을 하는 내부기생충 (endoparasite)에 주로 속하며, 절지동물은 숙주의 외부에서 기생을 해 나가는 외부기생충 (ectoparasite)으로 보통 분류된다. 내용을 조금 부연하여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원충 (Protozoa) - 동물계의 기생충 중 단세포성 생물체 (원생동물)에 속하는 기생충 (ex. 말라리아 원충)
▶ 연충 (Helminth) - 동물계의 기생충 중 조직과 기관이 발달한 다세포성 생물체 (그중 편형동물, 선형동물)에 속하는 기생충 (ex. 회충)
▶ 절지동물 (Arthropod) - 기생충 중 조직과 기관이 발달한 다세포성 생물체이며, 몸과 다리가 마디로 되어 있는 절지동물에 속하는 기생충 (ex. 모기)
아직도 복잡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 가지 포스터 그림을 준비하였다. 이 포스터는 미국의 건강보험제도를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포스터 속 나오는 기생충의 분류가 너무도 탁월하고 명확하여 이 글에서 잠시 출처를 밝혀 인용하기로 하였다.
아래 주황색 첫 번째 칸에 그려진 기생충들이 단세포의 원충류 (protozoa), 두 번째 파란색 칸에 그려진 기생충들이 다세포의 연충류 (helminths), 그리고 초록색의 세 번째 칸에 그려진 기생충들이 절지동물 (arthropod)이다. (네 번째 칸은 기생충으로 비유한 건강보험제도...) 이 내용으로 구독자들에게 따로 지필시험을 치를 것이 아니기에, 바로 와닿지 않는다고 하여 절대 자책할 필요는 없다. 대략적인 감을 알아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기생충'은 이렇게나 다채롭고 다양하다.
그렇다면 과거 6-70년대 기생충 구제와 방제를 위해 만들어졌던 포스터 속 기생충들은, 기생충 분류 안에서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을까? 그 당시 유행했던 기생충들로는 회충, 구충, 편충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연충류 (연충류에서도 선충류)에 속하는 기생충들이다. 도식을 통해 살펴보자.
그렇다. 우리가 머리로 떠올리는 '기생충'의 이미지는 그저 거대한 '기생충 제국'의 작은 한 부분에 속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 밖에도 너무도 많은 기생충들이 있고, 심지어 우리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기생충들은 사람과 동물에게 유해를 끼칠만한 것들만을 따로 모아 분류한 것일 뿐이다.
나는 박사학위 논문으로 '톡소포자충'이라는 기생충을 전공하였고, 그 기생충은 위 도식에서 원충류에 속해 있다. 더 자세한 전공으로는 '톡소포자충' 안에서도 '톡소포자충과 숙주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안에서도 '뇌 내에서의 상호작용' 그리고 그 안에서도 '질병상태 (퇴행성 뇌질환)에서의 톡소포자충의 영향'을 연구하고 있다. "이 어찌 코끼리를 알기 위해 코끼리의 다리만을 더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다음 편에서는 원충류와 연충류, 그리고 절지동물 중에서 가장 먼저 원충류에 대해서 다뤄볼 것이다. 그러면 본 편의 마무리를 뉴턴 선생님께서 임종 직전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남긴 말씀으로 끝내고자 한다. 그럼 다음 편에 원충과 함께 돌아오도록 하겠다. 씨유쑨.
“...나는 항상 내 자신을 바닷가에서 장난을 치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네. 내 앞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진리의 대양이 펼쳐진 채로, 이제나저제나 더 매끈한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질을 찾으려고 애쓰는 소년 말일세.”
- 아이작 뉴턴 -
[1] 채종일 외 11명. (2011). 임상기생충학.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p.23
[2] Matthews, H., & Noulin, F. (2019). Unexpected encounter of the parasitic kind. World journal of stem cells, 11(11), 904.